SNS에 없는 이야기들
달려본 사람은 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달릴 때 뒤쳐져서 쫓아가며 달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반면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뒤쳐지고 자신이 앞서나갈 때 얼마나 더 힘이 나는지도 알 거다. 마침내 맨 앞에서 달리고 다른 사람들이 뒤에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면, 반면에 당신은 힘들지만 여전히 달릴 수 있을 때, 그때 어떤 희열과 때로는 쾌감까지 느끼면서 힘을 얻게 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보통 함께하는 것의 힘을 강조하는 글들을 더 많이 본다. 어려운 일을 마주쳤을 때 혼자 그것을 겪어내는 것보다 함께 겪어낼 때 성과가 더 높다는 건데, 그러면서 주로 동기부여와 단지 같이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힘을 얻는다는 관습적인 말들을 엮어내는데, 사실 이런 말들이 이제 진부하고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나는 어떤 성과적 결과의 원인들을 느슨한 관습의 고리로 꿰어내면서 공동체적 가치를 설파하는 말들에는 진작부터 질려버렸다. 내가 그 멋진 공동체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단순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주로 보아오지 않는가? 이병헌의 가십은 어떤가? 유부남인데 바람을 피고, 어린 여자에게 집적대고, 그 여자는 또 돈을 요구하다가 실형을 선고받고, 이민정의 심경을 궁금해하고. 얼핏 보면 불륜과 꽃뱀처럼 선정적인 단어가 상징하듯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동체적 가치를 무너뜨린 유명인을 단죄하며 대중의 알권리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단순한 것이다. 메이저 마이너 언론사들과 플랫폼의 구조적 문제에 따른 어뷰징, 선정성 등은 차치하고 그것은 사실 가장 단순하게 대중의 욕구에 기인해 있다. 더 단순히 말해, 대중의 즐거움,
샤덴 프로이데(Scahdenfreude). 이곳에 그 본질이 있다.
이 독일 단어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불행을 보고 느끼는 즐거운 감정을 뜻하는 말이다. 보자마자 대표적인 몇 개의 소설들을 떠올리면서 새디스트를 연상할지 모르겠지만, 성적 취향과는 무관하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진술한 말이다. 2006년 독일의 Singer 교수가 네이쳐에 발표한 연구와 2009년 일본의 Takahashi 교수가 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에서 잇따라 샤덴프로이데가 사회학적인 반응이 아니라 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작용임이, 그리고 반응이 일어나는 뇌의 부분이 복측 선조체(Ventral Striatum) 라는 이름도 어려운 곳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 반응이 시기심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배측 전측대상피질(dACC)의 활성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주목할 부분은 두 가지다. 배측 전측대상피질은 불확실성과 갈등을 추적하고 관찰하는 부분인데 우리가 시기심이나 질투를 느낄 때 활성화되는 곳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느끼는 갈등 때문이다. 한편 복측 선조체는 기쁨, 중독, 보상과 관계되어있는 곳으로 오랜 수업 끝에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시거나 여자들이 타르트를 먹을 때 활성화되는 부분이다. 즉, 샤덴프로이데는 시기심이나 질투의 감정과는 다른 뇌의 부분이 활성화되는 감정으로 실제로 즐거움을 느끼는 실재하는 감정이라는 것이 연구로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잘 나가던 사람이 무너지는 것을 볼 때 즐거움을 느끼는 현상을 설명할 때 처럼, 시기심과 샤덴 프로이데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도 밝혀졌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짐작했겠지만 샤덴 프로이데가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이것을 잘 내놓고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마주하고서는 상대방의 고통이나 불행에 동조해주고 위로해주는 것이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동정심은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이코패스를 제외하고서는 모두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강요에 따라 우리 자신도 안에 있는 그 감정을 들여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샤덴 프로이데는 기쁨, 슬픔, 동정과 같은 다른 감정들과 달리 현상 뒷면에 숨어 있는 심지같은 감정에 가깝다. 예를 들어, 달릴 때 하나 씩 제치고 맨 앞에서 달리면서 힘이 더 난다든가 다른 학생이 선생님한테 혼나는 걸 보면서 뿌듯해 한다든가, 신문으로 가십을 보기를 좋아한다든가 하는 현상들 뒷면에는 "(다른 사람들이 뒤쳐지는데 나는 아직 뛰고있고), (다른 학생은 혼나는데 나는 혼나지 않고 있고), (가십에 나온 사람은 무너지고 있는데 나는 방에서 라면을 먹으며 그 뉴스를 보고 있고)" 같은 부가적인 상황에서 느끼는 샤덴프로이데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샤덴프로이데는 때로 가장 극렬하게 표면으로 솟구쳐 오르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십이다. 가십에 대한 대중들의 욕구와 이 욕구에 반응하는 언론과 이에 다시 반응하는 대중들 간의 고리에서 분출되는 샤덴프로이데는 도식적으로 간단하다.
나는 그들이 곤란하고 난처한(혹은 그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빠져서 무너지고 있는 걸 보는 게 즐거워. 나에게 그 뉴스를 계속 들려줘. 그러면 너는 돈을 벌고 우리는 그들을 더 무너뜨릴 수 있으니까.
짐짓 점잖은 척 앉아서 트래픽과 어뷰징에 대해서, 이제는 재정의되어야할 저널리즘에 대해서, 그리고 다시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서 얘기할 수도 있다.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이면의 위선적인 대중의 욕구에 애써 눈을 돌리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글쓰는 사람으로서 충분히 소임을 다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은 서비스의 철칙이지만,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법률과 윤리체계의 경계에 서있으면서, 잠재적 소비자의 권리까지 침해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성찰이 먼저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서비스 제공자가 그 성찰을 충분히 해내고 있지 못할 경우에, 이제 그건 글 쓰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