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 넘도록 통증에 시달리던 아내가 지친 숨을 내쉬며 하는 말,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긴 시간 누르다 누르다 속에서 끌어내는 말은 말이 아니다. 신음이다.
이럴 때 건성으로 아무렇게나 위로라고 하다가는 필경 더 속상해진다.
달리 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질문으로 그 무게를 덜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궁금해, 사는 게 더 힘들까? 죽는 게 더 힘들까?”
“글쎄? 둘 다 쉽지 않은 것 같은데?”
한참을 생각하던 아내는 하나를 고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아내에게 권했다.
“그렇다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쉬운 게 아닌데 뭐 하러 고민해?
죽는 거 쉽지도 않다면서 뭐 하러 죽으려고 애를 써...”
“그런가?”
“뭐 그렇다고 살고 싶다고 발 동동 구를 필요도 없지?
냅둬도 쉽게 죽지도 않는다는데 굳이 그럴 것도 없잖아!”
누가 그랬다.
이거냐 저거냐 고민이 될 때는 아무거나 해도 상관없다고!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면 고민도 안하고 이미 선택했을테니.
고민 한다는건 51%와 49%, 단 2%도 넘지 않는 차이뿐일때다.
그러니 그렇게 별 다르지 않은 장단점을 가진 두가지 중에
어느것을 선택하든지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었다.
사느냐 죽느냐 고민하는 것도 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무슨 상황에도 사는 쪽에 마음이 간다면 살려고 노력할거다.
고민도 우는 소리도 안하고 개똥밭도 좋아라 하면서 살거다.
살 이유가 하나도 없고 죽는 것만 좋다면 벌써 떠나고 없을거다.
둘을 놓고 팽팽한 저울처럼 날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괴롭다면
내일 아침부터는 눈뜨자마자 고민 관두고 그냥 살면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밤에 죽음이 오면 그냥 죽음속으로 떠나면 된다.
어차피 둘 중 하나에 목매고 달려갈 확실한 선택없는 태도라면...
다만 2%정도의 이내에서 변덕부리는 심정은 뭐 눈감아주라.
날마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울었다 웃었다 하더라도.
또 어느 날은 희망에 겨워 의욕이 넘치고,
다른 날은 잔뜩 흐린 무거운 좌절감으로 안달을 하더라도!
그럴 수 있지. 비슷한 양쪽 세계에서 51%와 49%의 마음으로 살다보면.
바람이 불거나 종이 한장의 무게가 더해지는 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아니면 눈 먼 행운이나 재수 없는 우연때문에 왔다갔다 할 수도 있고!
내가 꼴랑 그러고 살면서도 그런 내 자신을 못견뎌 수시로 자책했다.
언젠가 아내는 그런 나를 보고 왜 그러고 사냐고 말렸다.
어차피 사는 건 51%와 49%의 싸움인데 피곤하게 그러냐고.
산다는 건 그 두 마음이 두 저울에 올라 이리저리 기울어가며 사는 거라고.
그런데... 그 말을 했던 아내가 이제 아프면서 그 지혜를 잊어버렸다.
사람이 형편이 너무 열악해지거나 몸이 망가지면 알던 생각도 못한다.
‘그건 남의 이야기 할 때고...’ 가 된다.
누가 자유로울까? 옳은 이야기, 화려한 설교를 늘어놓고 사는 사람도
막상 내 발에 불도 떨어지고 주머니 돈도 떨어지고 사방이 캄캄해지면
그동안 말이 말짱 헛소리에 가까운 죽은 말이 되어버리는 경우에서.
그저 연약하고 불쌍한 피조물의 한계라고 긍휼이 여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