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마을, 그러나 조용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을 메시아를 기다리며 드리는 회당의 집회는 그저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있었다. 수 십 년을 인도해온 랍비나, 참석해온 늙은 사람들은 너무도 익숙한 습관이 되어 노련할 지경이었고, 역사가 그러듯 어린 아이들은 오히려 호기심과 재미로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더 기도하는 사람과 집회 후 무엇을 하려고 딴 마음을 가진 사람까지 뒤섞인 상황이야말로 이 시대의 교회 예배나 2 천 년 전이나 다를 바 없어서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사람이 거기서 거기인 점은 창조이래 변함이 없나보다.
“우리 집에서 저녁 드세요! 아이들과 약속했어요.”
랍비의 축도가 끝나자 더 밝아진 얼굴들로 주고받는 교제의 시간, 안식일과 집회와 메시아를 기다림이 긴 세월이 지나가면서 이제는 반복되는 하나의 생활이 되어버렸음을 모두가 편히 적응하고 있다. 마치 현재의 교회 속 성도들처럼... 천방지축 아이들이 마을 공터로 뛰어가는 소란함속에 하늘위에서 성령이 내려오고 있었고, 머지않은 날에 동정녀에게서 세상의 고통을 끌어안을 한 사람이 오는 것을 아무도 모른 채, 그들의 기다림은 지금의 신앙인들처럼 그저 생활 속 한 조각으로 기다림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다림은 너무 길면 안 된다.
기다리다 지쳐 마음을 접는 이도 있고,
기다리는 동안 너무 고달파 원망하는 이도 있고
기다림이 건성이 되어 위장의 삶으로 회색빛이 되어가기도 하니
기다림이 생활이 되어버렸다고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사모하는 그리움은 단기간의 시간이고 하루의 나머지는 길기만하니, 그 남은 시간을 먹고 일하고 시집 장가가고 돈 버는 일에 골몰하지 않고 베겨낼 믿음이 누구에게나 있기가 쉬울까? 그러니 기다림이 엷어지고 가벼워지고 낡은 장신구처럼 되어 삶의 한쪽 끝에서 달랑거리더라도 비난하기 어렵다. 헤어짐이 길수록 사랑도 식어가는 법. 그나마 생활의 가운데라도 있던 기다림이 갈수록 끄트머리로 점점 밀려가는 걸 보기 힘드셨나 보다. 그래서 속히 오시려 마음 조급해지시는 하나님...
(1977년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6부작 영화 ‘나사렛 예수’는 그렇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