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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규 Aug 28. 2024

이제 와 새삼.. 23층 남자의 유혹에 넘어갔다

필라테스 이야기 - 1

지하 2층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 안에는 언제나 그 남자가 있었다. 이른 새벽녘, 이렇게 마주친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지상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면 어김없이 ’23층’ 버튼에 불이 켜져 있다. 아파트 23층에 사는 남자다.


내가 ‘20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 한 평 남짓한 은빛 사각형 공간을 꽉 채우는 건 무거운 침묵이다. 20층에 닿을 때까지 약 40초의 어색함을 견뎌야 한다. 다시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나는 서둘러 나가 왼쪽으로 몸을 튼다.


‘저 빡빡 머리.. 2004호에 사는군.’


23층의 남자는 진즉에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왼쪽은 4호, 오른쪽은 3호 라인이니까. 같은 아파트, 같은 동의 주민들은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어떻게 생긴 사람이 몇 호에 산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웬만해선 서로 말을 걸지 않는다.


23층의 남자와 나도 그랬다. 국룰과도 같은 ‘엘리베이터 안의 침묵’을 깬 건 그였다. 지난 봄, 동트기 전 아직 컴컴한 새벽이었다. 그날도 그는 지하2층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오늘도 한강까지 달리셨나봐요.”

“네?”


갑자기 깨진 침묵보다 자세한 질문 내용이 더 당혹스러웠다. 땀 범벅이된 얼굴을 훔치며 등 뒤에 있는 그를 고개 돌려 바라봤다. 방금 사우나를 마쳤는지 붉게 상기된 23층 남자의 얼굴은 반들반들 윤이 났다.


“자전거 타고 종종 그쪽으로 가는데, 달리시는 거 몇 번 봤어요.”

“아, 네….”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20층에 도착했다. 나는 짧게 목례를 하고 내릴 준비를 했다. 남자도 고개를 숙였다. 팽팽한 피부만큼이나 젊어 보이는 그의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이 두피 위에서 출렁였다.


남자의 키는 170cm 정도로 큰 편은 아니지만, 몸이 다부지고 얼굴 주름이 적은 편이어서 나이는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20대 여성이 “아빠”라 부르는 걸 들은 적 있어, 50대 중반으로 추정될 뿐이다.


어쨌든 23층 남자의 질문은 모두 사실이다. 집 가까운 곳에 홍제천이 흐르는데, 이 냇가를 따라 한강까지 달렸다 오는 게 약 5년 전부터 이어진 나의 아침 루틴이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오전 6~7시께에 자주 마주치는 걸 보면, 그에게도 어떤 루틴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후에도 그와 자주 마주쳤는데, 둘 사이의 공기는 이제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되고 말았다. 한 번 말문을 텄으니 무슨 말이라도 주고 받아야 하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40초 동안에 나눌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 5000만 국민이 할말 없을 때 꺼내는 날씨 이야기도 하루 이틀이면 동나기 마련 아닌가.


그도 많이 어색했는지, 갑자기 이런 제안을 했다.


“저기.. 혹시 저랑 같이 필라테스 하실래요?”


성,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 취향도 모르는 이웃집 남자에게 필라테스 하자고 제안하다니. 꽤 도발적(?)인 제안이란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필라테스요?”

“제가 아침에 필라테스를 하거든요. 해보면 참 좋아요.”


나도 모르게 23층 남자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확실히 다부지지만, 아무리봐도 필라테스 강사의 몸은 아닌 듯했다. 그가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채고 말았다.


“저는 강사 아니고 수강생이에요. (웃음) 아파트에서 하는 건데….”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20층에 도착했다. 엘레베이터 안에서 사랑을 나눌 순 있을지 몰라도, 적절히 대화를 마무리 하는 건 정말 어렵다. 끝내지 못한 대화를 이어가려면 다시 우연히 마주쳐야만 했다.


우리의 40초 토막 대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마다 필라테스 전도사처럼 말했다.


“필라테스 하니까 몸도 유연해 지고 좋더라구요..”

“처음엔 힘들었는데, 몸이 노근하게 풀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우리 나이 되면 몸이 뻣뻣해지잖아요. 적절하게 풀어줘야..”

“우리 나이 되면 근육도 중요하지만, 유연성 키우는 것도….”


아니, 근데 왜 자꾸 우리 나이라고 하는 거지? 시대를 앞서간 비주얼 탓에 많은 사람이 내 나이를 실제보다 10년 정도 많게 보곤 하는데, 대학생 딸을 둔 이웃집 아저씨마저 날 동년배로 여길 줄이야. 난 23층 남자를 나보다 최소한 10살 정도는 많게 봤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다.


그동안 몸이 뻣뻣하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실제로 그러하니 괜한 말은 아니다. 요가를 추천하는 지인들이 많았는데, 이젠 이웃집 남자마저 유연성을 강조하며 필라테스를 제안하니 기분이 묘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 그런 나이가 됐는지도 모르다. 근육을 지키는 동시에 유연성도 키워 낙상사고를 사전에 예방해 무병장수를 도모해야 하는 나이 말이다. 근데, 이런 생각을 하니 괜히 뭔가 억울하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23층 남자의 제안을 외면하고 살던 대로 살았다. 아침에 1시간 정도 달리고, 스쿼트 100개 하고, 턱걸이 15개 하고.. 1976년인 내가 이정도 루틴이면 됐지 싶었다.


아파트 옆 공원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이 축구를 하던 어느 휴일이었다. 공원을 산책하는데 축구공이 내 앞으로 굴러왔다. 왕년의 내 꿈은 축구선수였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축구공을 아이들에게 차 줬다. 그날따라 공이 내 발등에 제대로 맞았다. 축구공은 멋진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 아이들 앞에 정확히 떨어졌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기분이 확 좋아졌다.


“와, 할아버지 대박! 짱!”

“할아버지 우리랑 같이 축구해요!”


세상에나, 할아버지라니…. 나한테 할아버지라니! 한껏 좋아진 기분이 급강하 했다. 내가 보는 나와, 나를 보는 타인들의 생각이 크게 다른 게 분명했다. 아파트 커뮤니티센터 게시판에 붙은 홍보물이 색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맨즈필라테스. 강습료 40,000원. 정원 12명. 화, 목 06시 05분~06시 55분.’


검은색 ‘난닝구’를 입은 백인이 요가메트 위에서 두 팔을 수직으로 뻗어 유연성을 뽐내고 있었다. 별 어렵지도 않은 동작을 저렇제 진지하게 하다니.


저 정도는 나도 하겠다는 생각에 오가는 사람이 보든 말든 나는 백인과 똑같은 자세를 잡아봤다. 팔은 올라가지 않고, 옆구리는 땡기고, 허리에선 우두둑 소리나고, 허벅지를 후들두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얼른 몸을 세웠다.


나는 홍보물 속 백인을 빤히 바라봤다. 시인 고정희가 쓴 시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어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 고정희, <사십대>에서


땅바닥에 침을 뱉지 않아도 외롭고 슬펐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홍보물에 새겨진 QR코드를 스캔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수강신청을 했다.


화요일, 목요일이면 오전 5시께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아파트 커뮤니티센터 GX실로 간다. 그곳에 가면 사십대 이랑에 들어선, 또래의 중년 남성 십여 명이 요가 메트 위에 서 있다. 물론 30대로 보이는 남성도 있다. 누구는 벌써 몸을 풀고, 누구는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며, 누구에게선 살짝 술 냄새가 난다.


우리와 차원이 다른 사람은, 우리보다 훨씬 젋고-건강하고-유연한, 유일한 여성인 강사님뿐이다. 강사님이 들어와 구령을 붙이면 30평 남짓한 GX실을 채우는 건, 뻣뻣한 몸을 어떻게든 찢고-벌리고-늘리느라 낑낑대는 중년 남성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다.


이제와 새삼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다들 찢어지지 않는 팔다리 붙들고 그토록 애를 쓴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화요일-목요일 아침마다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건 23층 아저씨다. 나는 그가 필라테스 강사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근데, 필라테스는 06시 05분에 시작하는데 왜 05시께에 일어나냐고? 그게 다 몸 쥐어짜다가 혹시라도 ‘방귀’가 새어나올까봐 그러는 거다. 사전에 몸을 비워내야 가스 분출 사고를 막을 수 있다.


필라테스 시작한 지 2개월, 아직 사고 낸 사람은 없다. 강사님 구령에 맞춰 몸을 풀다가 갑자기 후다닥 달려나가는 아저씨는 두어 명 있었다. 정말이지 다들 애 쓰며 산다.


필라테스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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