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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 걱정이 많아요?”.. 유년의 내가 물었다

by 박상규

연기며 튀는 기름 탓에 삼겹살은 내가 내키지 않았다. 날 것을 선호하는지도 모르면서 덜컥 일식을 예약할 수도 없었다. 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태리 식당을 잡았다가 신라면 한 젓가락 수준의 파스타가 나오면 움켜쥔 포크의 반짝거림은 얼마나 무안할까.


11년 만에 조카와 독대하는 자리. 열두 살이던 아이가 대학 졸업반 스물세 살 여성이 됐으니, 어디서 무얼 먹으며 어떤 이야기를 할지 여간 신경 쓰인 게 아니다. 국밥으로 퉁 치기엔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었고, 유명 맛집 앞에서 번호표 뽑아 줄 서서 대기하기엔 세월이 벌려놓은 서로의 관계가 어색했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린 끝에 광화문 파이낸스센터(finance center) 빌딩으로 결정했다. 장소가 주는 이미지, 건물명이 풍기는 느낌으로 조카가 삼촌의 사회적 지위를 한껏 높여 가늠하길 바란 속물적 선택이었다.


스테이크를 썰면 쌈장이나 상추, 깻잎을 추가할 일이 없어 이야기가 잘려나갈 염려도 없을 듯했다. 파이낸스센터의 지하 스테이크 하우스는 삼촌이란 남자가 여자 조카에게 11년 만에 밥을 사기에 딱으로 보였다.


조카는 약속 시간보다 다소 늦게 도착했다. 눈물 어린 반가운 미소, 환한 얼굴의 포옹… 영화-드라마에서도 이런 장면은 처자식 만날 때나 등장한다.


“삼촌은, 뭘 이런 데를 잡았어요?”


이렇게 해야 최고의 쿨한 태도라는 듯, 조카는 긴 머리를 만지며 맞은편에 앉았다.


“삼촌은 컵라면 먹듯이 이런 데 와.”


조카가 웃지 않는 바람에 나의 농담은 허세가 되고 말았다.


“와인이라도 한 잔 하자.”


하우스와인 한 잔이면 될 것을, 조카는 비싼 축에 드는 와인을 병으로 시켰다. 조카는 농담과 진담을 엇갈려 이해하는 듯했다. 흔들리는 나의 눈빛을 조카가 눈치채지 않길 바라며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조카는 음식보다 와인리스트를 더 유심히 살폈다

초등학교 4학년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건너 뛴 채 만났으니,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지 난감했다. 나와는 달리 조카는 지난 시절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녀석은 음식이 나올 때마다 인스타용 사진 찍기에 바빴다. 살짝 섭섭했다.


삼촌과 조카 사이에 뭔 유별이냐 싶겠지만, 나에게 조카는 촌수를 넘어서는 특별한 존재다. 작은누나가 녀석을 낳았을 때, 그 아이가 내품에서 울거나 함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조카도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내 자식을 낳으면 어떤 기분일까? 그 사랑을 난 감당할 수 있을까?’


그건 일종의 공포였다. 사랑의 지평이 넓어진 기분이었지만, 그만큼 깊은 수렁에 빠진 듯한 느낌도 들었다. 저 예쁜 것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싶은 괜한 걱정이 드는가 하면,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무섭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때의 내 감정은 아마 불안이었지 싶다. 작은누나와 매형이 녀석을 제대로 사랑해 주지 않을 것만 같은 걱정 말이다. 그 불안은 꽤 근거가 있었는지, 정말로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을 했다.


녀석은 안양시에 거주하는 아버지와 곁에 남았다. 녀석의 엄마인 나의 작은누나는 서울 중구 남산타운아파트에 살았다. 몇 년 뒤 작은누나는 재혼을 했다. 그 과정이 배려와 이해와는 거리가 멀었는지, 녀석은 엄마와 인연을 끊었다.


엄마와 관계를 끊은 조카가 외삼촌인 나와 가깝게 지낸다는 건 또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가. 그렇게 녀석은 나와도 멀어졌다.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일주일 정도 씹는 양상으로, 그러다 영영 연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내 새끼를 잃은 듯이 아팠다. 11년의 공백은 그렇게 생겼다.


스테이크를 썰고 와인을 홀짝 거릴 땐 “많이 아팠고, 보고 싶었다”는 말을 못했다. 그런 말을 하기엔 아직 조카가 어색했다. 조카는 조카대로 더 찍어야 할 인스타용 사진이 남아 있었다. 우린 서로의 마음에 가닿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살 날이 많으니 아쉽진 않았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지 5월의 밤공기가 상쾌했다. 바로 헤어지려고 하는데, 녀석이 제안을 했다.


“삼촌, 속이 느끼하고 느글거리는데 김치찌개에 소주 한 잔 더 하실래요?”


기껏 소고기에 비싼 와인 멕여놨더니 소주라니. 세월의 강보다 조카의 속이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지간해선 소주를 마시지 않는다. 쓰고, 맛 없고, 독하고, 냄새나고, 무엇보다 다음날 노동에 치명적이다.


“삼촌이 생긴 건 말술인데…. 술을 잘 못 마셔. 그냥 맥주나 한잔 할까?”

“맥주는 배부른데….”


내 기억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에 멈춰 있건만, 녀석은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시길래 맥주는 배불러서 싫다는 동네 술꾼 같은 말을 할까. 어쨌든 조카의 느끼함을 해소하기 위해 우린 김치찌개를 찾아 무교동 골목을 헤맸다. 그 밤에 골뱅이도, 치킨도 아닌 김치찌개라니.


오른쪽이 조카다

한 삼겹살 전문점으로 들어가 사정을 해서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내 앞에는 맥주가, 내 새끼 같던 조카 앞에는 소주가 놓였다. 녀석은 자꾸만 건배를 권했다. 녀석은 연거푸 소주잔을 비웠고, 김치찌개 국물을 맥주처럼 들이켰다. 이럴 거면 괜히 폼 잡느라 스테이크 샀다.


“삼촌은 소주도 못 먹고, 술도 많이 못 마시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


이 무슨 알콜중독자 같은 말인가. 술 말고도 재밌는 게 많다는 말을 하면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이 될까봐, 말을 돌렸는데 오히려 구한말 훈장님 말이 나오고 말았다.


“내일이 걱정돼서 못 마시겠다. 실제로 소주로 막을 수 없는 일이 한가득이고.”


조카는 김치찌개에 속이 풀렸는지, 아니면 몇 잔의 소주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내게 궁금한 걸 묻기 시작했다.


조카 - “결혼은 왜 안 해요?”

나 - “네 엄마-아빠처럼 이혼할까 봐. 아마 나도 그럴 거 같어. 삼촌은 책임감이 약하거든.”


조카 - “애는 앞으로도 안 낳을 거예요?”

나 - “어. 책임감이 약하다니까. 제대로 못 키울 거 같아서.”


조카 - “왜 그런 생각을 해요?”

나 - “……”


나는 조카를 빤히 바라봤다.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결심은 조카와 함께 한 어느 밤의 기억과 연결돼 있다. 녀석이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녀석은 엄마를 만나기 위해 종종 안양에서 서울 중구 남산타운아파트로 왔다. 엄마와 주말을 보내고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고단한 일상.


어느 해 일요일 밤이었다. 엄마와 주말을 보낸 녀석을 안양의 아버지 집까지 데려다 주는 미션에 나에게 주어졌다. 하필이면 자가용을 이용할 수 없어서, 나는 그 어린 조카의 손을 잡고 전철과 버스를 타고 안양으로 향했다.


서울 사당에서 버스를 타고 과천을 지날 때였지 싶다. 나는 조카와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았는데, 어느 순간 내 오른쪽 팔이 무거워졌다. 버스에서 잠든 녀석의 머리가 내게 떨어진 것인데, 그 순간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내 팔에 고개를 떨군 건, 조카이면서 동시에 유년시절의 나였다.


책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에서 쓴 대로, 나는 의왕시 청계산에 사는 아버지 집과 안양시 창신여인숙 2층 끝방에 사는 엄마 사이를 오가며 유년을 보냈다. 거룩하든 비루하든, 나를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그 시절 그 먼 길을 오가며 만들어졌으리라고 나는 책에 적었다.


내 유년의 한 토막이 고스란히 복사되어 조카에게 붙여넣기가 된 상황. 피보다 진하고 징해서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어떤 비극이 내 새끼 같은 조카에게 대물림된 듯해 내 가슴은 버스보다 심하게 흔들렸다.


그 버스 안에서 나는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결심 아닌 겸심을 하고 말았다. 상처의 대물림을 끊어내는 길은 그게 최선으로 보였다.


나는 눈앞에서 소주잔을 들고 있는 조카에게 그날 버스에서 본 풍경과 결심을 이야기 해줬다. 이번엔 조카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녀석의 눈이 조금 붉어졌는데, 그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술기운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윽고 녀석이 입을 열었다.


“삼촌….”


녀석은 한 템포 쉬었다.


“삼촌은 왜 그렇게 걱정이 많아요?”

“어? 뭐?”


유년의 내가, 어느새 늙어버린 나에게 따지듯 묻는 듯해, 머리가 띵했다. 조카는 어벙벙한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삼촌, 뭐 그렇게 걱정이 많냐고요! 저 이렇게 잘 자랐고, 지금도 그럭저럭 잘 살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 살게요! 애를 낳으면, 걔도 알아서 크고, 어떻게든 잘 살겠죠. 뭘 그렇게 지레 겁 먹고, 걱정하면서 살아요? 지금도 안 늦은 거 같은니까. 애 하나 낳으세요! 내 사촌 동생 하나 만들어 달라고요! 자, 삼촌 한 잔 하고…. 할 수 있다! 홧팅!”


조카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다시 김치찌개를 맥주처럼 들이켰다. 맥주 마시고 취했는지, 이번엔 내 눈이 간지러웠다.


흔들리는 버스 맨 뒷좌석에서 잠든 그 어린 조카는 이렇게 성장했는데, 나는 여전히 유년의 버스에서 내리지 못한 채 한 치도 자라지 못한 건 아닌지…. 목적지는 이미 지났고, 마땅히 내려야 할 곳도 한참 전에 지났는데 말이다.

조카의 말대로 사는 게 뭐 별거라고, 때로는 스테이크의 느끼함을 소주로 씻어내면서 살아도 괜찮은데, 나는 왜 살아가는 일을 그토록 어렵고 복잡하게만 생각했을까…. 어쩌면 나는 진정으로 사랑할 용기가 없어 과거의 상처에 머무는 걸 택한 것일 수도 있다.


무교동에서 헤어진 조카는 전철을 타기 위해 시청역으로 향했다. 나는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721번 버스를 탔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소주를 마시면 도저히 완수할 수 없는 내일의 일과, 그래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왔던 어제의 일과 유년의 버스에서 내리지 못한 나의 비겁함을 두서없이 곱씹었다.


더위도 한풀 꺾인 듯하니 내일은 김치찌개나 한 번 끓여야겠다. 돼지고기 팍팍 넣고, 두부도 반듯하게서 썰어 넣어서 말이다. 또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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