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북쪽에서 바람이 불었는지 거실창 너머의 아침 하늘이 새파랬다. 찬 공기가 내려온 게 분명했다. 전날 밤, 마른 미역을 물에 담가 놓길 잘했지 싶었다.
물을 빨아들인 미역은 넓고 둥근 ‘스뎅 용기’를 꽉 채울 만큼 불었다. 미역을 토막내 참기름에 볶았다. 홍합으로 낸 육수를 볶은 미역에 붓고 푹 끓였다. 국물이 조금씩 뽀얗게 변했다. 밤처럼 검은 미역에서 안개같은 흰 국물이 나오다니. 미역국을 끓일 때마다 신기하다.
완성한 미역국을 그릇에 담고 홍합살을 고명처럼 올렸다. 사진을 찍어 “따뜻한 것이 먹고 싶었다”는 글과 함께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후배 기자가 바로 댓글을 달았다.
“미역국 하나에 아침부터 눈물이 핑~.”
몇 해 전 초겨울, 이른 아침의 일이다. 본인 먹으라고 끓인 것도 아닌데 이런 반응이 나오다니. 갑자기 떨어진 기온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김치찌개나 된장국이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반응. 오직 미역국만 불러낼 수 있는 감정이지 싶다.
유별난 가정환경 탓에 생일이면 미역국을 먹는 한국의 보편적 문화를 누리지 못했다. 미역국과 얽힌 눈물 도는 따뜻한 경험도 없다. 다만 거친 사내들이 남긴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하나 있다.
아버지와 둘이 살던 집은 경기도 의왕시 방면 청계산 깊은 곳에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해 겨울, 우리집 뒷산에서 벌목이 진행됐다. 산에서 나무를 베고, 나르고, 쌓는 거칠고 고된 노동을 하는 남성 노동자는 5~6명이었다.
거처가 제 각각이던 벌목꾼들은 그 산골까지 출퇴근 할 수 없었다. 우리집은 보신탕을 파는 식당이었으니, 겨울은 휴업이나 다름 없었다. 한 마디로 우리집은 벌목꾼들이 먹고 자는 숙소로 이용하기에 딱이었다.
여름의 열기가 사라진 쓸쓸한 보신탕 집을 ‘함바집’으로 운영해 한몫 챙기게 됐으니 아버지의 눈은 초설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조용한 집에 갑자기 식구가 늘어 어린 나도 기분이 좋았다. 한겨울 숲속의 우리집은 남자들의 세상이 됐다.
벌목꾼들의 삼시세끼를 책임지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거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밥상은 중요하다. 맛이 형편 없거나, 밥상에 고기 등 기름진 게 빠지면 난리가 난다. 성인이 되어 알바와 직업으로 노가다를 했을 때, “밥을 이따위로 내어 놓느냐”고 따지며 식판을 집어 던지는 노동자를 나는 종종 봤다.
그 터프하고도 까다로운 벌목꾼들의 입맛을 아버지 혼자 어떻게 책임졌는지 모르겠다. 밥상이 엎어지거나 국그룻이 허공을 가르는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걸 보면, 나쁘지 않은 식사를 제공했지 싶다.
돈 받고 파는 것이니 아버지는 분명 평소 나에게 해준 것과는 다른 ‘스페셜한 음식’으로 상을 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에 남은 건 딱 하나, 고깃덩어리나 흰 조개살 하나 없는 검은 미역국뿐이다.
벌목은 겨우 내 이어졌다. 나무가 베어질수록 우리집 뒷산은 아버지의 넓은 대머리처럼 훤한 속살을 드러냈다. 벌목꾼들이 임무를 완수하고 철수할 때가 임박했다는 뜻이다.
미역국이 올라온 그날 아침 밥상은 송별 만찬이 아니었다. 벌목꾼들이 소고기 한 점 없는 미역국을 특별식으로 여길 리도 없다. 식사를 마친 벌목꾼들은 뜨끈한 구들방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를 쑤시며 찝쩝 거리거리거나 담배를 피웠다.
벌목꾼들의 ‘대빵’ 십장 아저씨가 담뱃재를 털며 한 마디했다.
“고기 하나 안 들어간 미역국이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입니다. 정말 맛있게 잘 끓이셨네요. 박 사장님 덕분에 산골에서 잘 먹고 잘 지냈습니다.”
미역국이 어린 아이 입맛에 깊은 인상을 남겼을 리 없다. 나는 그날의 미역국 맛은 물론이고 국그릇에 담긴 모양새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식사를 마친 벌목꾼들이 둘러 앉은 좁은 방의 풍경과 그들이 뿜어내는 담배연기와 이를 쑤시며 쩝쩝 거리는 소리는 맛있는 추억처럼 떠오르곤 한다.
무엇보다 십장 아저씨의 저 한 마디는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문신을 남겼다. 나의 아버지가 음식을 꽤 잘 만들었다는 사실, 특히 고기 하나 넣지 않고도 미역국을 맛있게 끓였다는 기억 말이다. 어떤 음식은 혀가 아닌 한 마디의 말로 기억된다. 내게는 미역국이 그런 음식이다.
2025년 12월 14일 직접 김장을 했다. 지리산 피아골 텃밭에서 배추, 무, 갓을 키웠으니 직접 김장까지 하고 싶었다. 고작 다섯 포기, 동네 엄니들의 눈엔 소꿉장처럼 보일 규모였지만 내겐 큰 부담이었다.
내 생애 첫 김장을 한 사람이 도와줬다. 돼지 수육을 만들기 뭐해 미역국을 끓여 대접했다. 전날 해감한 바지락으로 육수를 내 만들었다. 생선 하나 올린 별볼일 없는 밥상에 앉은 그 사람은 고개를 숙여 미역국 한 술을 입에 떠 넣었다.
“맛있네요. 정말 맛있네요.”
진정으로 맛이 괜찮았는지 모르겠다. 다만 말이라도 그렇게 해준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한 마디 덕에 나 역시 아버지처럼 미역국을 잘 끓이나부다, 하는 어떤 위안의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좋은 유산을 물려 받았다는 생각과 함께 벌목꾼들이 둘러 앉은 산골의 구들방이 다시 생각난다. 그들이 이를 쑤시며 내던 쩝쩝 거리는 소리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