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미나인 Oct 01. 2021

터부의 재해석

풀이 무성한 옛 철길




 터부에 어떤 다른 이미지를 입힐 수 있을까요. 한번 열심히 생각해 볼까요. 살짝 억지스럽더라도요. 그래요. 꼭 나쁘게 생각할 필요 있을까요. 사실 수치심마저도 우리가 느끼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잖아요. 터부는 개인을 억누르는 느낌이 드는 단어이지만 대신 누군가가 꼭 지키고 싶었을 가치를 수호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거에요. 그것이 현시대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케케묵은 가치였던 간에 그 사람 눈에는 그것이 두려움을 안아야 할만큼 중요했을 지도 몰라요. 그 어두운 감정을 살짝 비틀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해 보려고요. 저는 터부를 만들어냈던 수많은 사람들 속에 소중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하는 애정이 동기였던 사람도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의도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이 방법은 진짜로 치사하고 용납할 수 없지만요. 또 이런 해석 방식이 현실 반영을 못한다는 걸 알지만요. 그래도 어쩌면요.


 터부란 단어에 다른 이미지를 부여하려면 우선 수치심과 공포를 느끼는 행위에 대한 정의를 달리해야해요. 항상 말해왔던 것처럼 수치심을 느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로써 완전히 뒤집을 수 있어요. 본래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구조잖아요. 하지만 만약 수치심을 와락 반겨버린다면요. 수치심을 느끼는 것만 같은 순간 불에 데인 듯 예민해지는 것은 어쩌면 본능적인 반응일 거에요. 하지만 수치심이 느껴질 때 이렇게 말하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어요. 수치심을 느껴도 괜찮아. 부정적인 감정은 억누르고 긍정적인 감정은 탐닉하는 것은 너무 케케묵은 알고리즘이에요. 이대로만 하다보면 넘치는 자극들 속에서 우리에게 결국 찐한 번아웃이 찾아오고야 말걸요. 수치심을 회피하는 것은 수치심을 이기려는 것이랑 비슷해요. 노력하고 애쓰는 느낌인 것 같아요. 근데 그러면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인간의 회피동기를 유도한다는 본래 기능을 더욱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끈질기게 곁에 머물 거에요. 수치심을 느껴도 괜찮다는 건 지금 현 상태 그대로 머물러도 된다고 저한테 알려주는 거에요. 그래도 괜찮다고 한 번 되뇌이면 한 순간이죠. 주사 맞기 전엔 두려운데 막상 맞고나면 뭐지 싶은거랑 많이 비슷해요. 수치심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걸 발견하면 아마 깜짝 놀랄 거에요.


 이 때 터부는 여전히 터부이지만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터부가 돼요.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은 수치심을 느껴도 상관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죠. 이런 경우에 터부는 약간 이런 느낌인 것 같아요. 더 이상 기차가 지나가지 않는 오래된 철길 있죠.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지고 그 사이로 풀들이 무성해져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버리는 그런 장소 말이에요. 그 시끄러웠을 또 번잡했을 공간이 신기하게도 오히려 가장 평화로운 그림이 되는 거죠. 터부가 기능할 때는 공포가 내면의 철길을 타고 정신없이 돌아다녔을지 몰라요. 하지만 공포를 반기게 되는 순간 더 이상 그 철길을 타지 않고 곧바로 온전히 받아들여진 후 사라지곤 할거에요. 편해질 거에요. 이 때 터부는 여전히 수치심을 동반하지만 무해한 터부가 돼요. 터부가 무해하게 느껴질 때 비로소 터부는 아마도 자연스럽게 적정한 만큼의 미묘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될거에요. 누군가의 수치심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용해줄 수 있는 긍정적인 사회적 기능이요.


 정리하면 이와 같아요. 저는 터부에 이런 이미지를 입히고 싶은 거에요. 철과 쇠라는 인공적인 철길과 그 사이로 무성하게 자라난 자연적인 풀과 꽃이 함께 겹쳐 기능하지 않은 터부가 되고 이 풍경을 함께 즐기는 사람들은 이를 통해 비로소 교감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그런 이미지요. 터부가 기능하지 않는 순간 되려 공감의 수단이 될 수 있다니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회색과 초록색이 겹친 모양일 것 같아요.


작가의 이전글 사랑이란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