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위해 남기는 기록
*이 글은 노치수 민간인학살경남유족회장의 요청에 따라 1990년대 이후 경남지역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정리한 내용이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경남을 비롯한 전국에서 결성되었던 유족회가 1961년 박정희의 쿠데타로 강제해산된 후, 40여 년만에 다시 민간인학살 문제가 우리사회의 주요 해결과제로 떠오르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1999년 5월 6000여 시민주주의 힘으로 경남도민일보가 창간되었다. 1990년부터 기자라는 직업으로 살아온 나는 정말 이런 신문사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자본과 권력 눈치 보지 않고 취재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는 신문. 모든 기자에게 꿈같은 일 아닌가.
우리보다 10년 먼저 창간했던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의 ‘4.3은 말한다’와 같은 기획취재를 해보고 싶었다. 경남의 근현대사에도 제주 4.3처럼 은폐된 역사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의 인력과 역량으로 팀을 꾸리기는 무리였다. 혼자라도 해보겠다며 기획안을 냈다. 그게 1999년부터 2001년까지 100회에 걸쳐 경남도민일보에 연재된 ‘지역사 다시 읽기’라는 시리즈였다.
기사를 연재하던 중 당시 63세였던 팽상림 씨로부터 장문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초기 마산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오빠(팽현진)가 보도연맹에 가입돼 학살당했으니 원통함을 풀어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한국의 현대사는 보도연맹사건을 은폐하고 있다. <분단을 넘어서>, <1950년대의 인식>. <해방전후사의 인식> 1·2편을 다 읽어봐도 없다.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민족의 증언> 여덟 권을 샅샅이 읽어봐도 없다. 밤을 새워 읽느라 눈만 상했다. 누구의 처벌이나 보상금도 원하지 않는다. 지금도 살아있다는 오제도 씨와 당시 내무·국방·범무부 등 관계자와 사회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어 결성되었던 보도연맹의 진상을 밝히고, 그들로부터 사죄 한 마디만 들어도 한이 풀릴 것만 같다. 이대로 잊혀서는 안 된다. 칠순 밑자리를 깐 우리 세대마저 가고 나면 증언할 사람도 없다. 역사는 거짓되거나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팽상림, 1999년 9월)
팽 씨의 편지를 지면에 소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남도민일보에 보도연맹원 학살에 대한 연속보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중부경남 쪽을 취재했고, 통영·거제는 전갑생 씨, 진주는 김경현 씨의 도움을 받았다.
와중에 AP통신의 노근리 학살 보도가 나왔다. 미군의 피란민 학살사건이 국제적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나도 보도연맹원 학살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마산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李) 씨 재실에서 발생한 곡안리 학살사건을 서둘러 보도했다. 이후 전국 곳곳에서 미군의 학살 사례가 터져 나왔다.
보도 이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가장 먼저 시대적 과제로 설정하고 대응에 나선 경남의 시민단체는 김영만 선생이 대표로 있던 ‘열린사회 희망연대’였다. 함안과 창녕에서도 미군에 의한 학살 사례가 드러나자 ‘참여와 연대를 위한 함안시민모임’과 조현기 씨 등이 진상규명에 나섰다.
민간인학살을 주제로 경남에서 열린 최초의 토론회는 1999년 12월 8일 마산 카톨릭여성회관에서 ‘경남 정신대 문제 대책을 위한 시민연대모임’ 주최로 열렸다. 당시 이 단체의 대표는 김현주, 사무국장은 김주완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민간인학살 문제는 ‘전쟁범죄’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20세기 전쟁범죄의 실상과 시민사회의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김주완은 ‘한국전쟁 전후 경남지역 양민학살의 진상’이라는 발제를 했고, 열린사회 희망연대 김성진 집행위원장이 ‘전쟁범죄 청산을 위한 시민운동의 역할’, 정동화 창원시의원(유족)이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정부와 지자체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토론했다.
2000년에는 전국 단위의 진상규명 운동단체 설립이 추진되었다. 2월 말 제주에서 열린 인권학술회의(한국인권재단 주최)에서 강정구(동국대), 강창일(배재대),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등 민간인학살에 관심 있는 몇 학자들이 첫 모임을 한 후, 4월 6일 위의 교수들을 포함, 정희상(시사저널), 정운현(대한매일) 기자, 김삼웅(대한매일 주필) 등 언론인들과 차미경 국제민주연대 사무국장 등 사회단체 인사들이 모여 전국적인 대응 필요성에 합의했다.
5월 19일에는 구례에서 열린 ‘제4회 동아시아 인권포럼’에서 별도 세션을 마련, 유족과 학자, 변호사, 언론인, 사회단체 등이 함께 참여하는 전국단체 결성에 뜻을 모았다.
당시 참석자를 보면 서승, 강정구, 강창일, 김동춘, 이이화, 도진순, 김영범 등 학자들 뿐 아니라 이중흥 제주4.3행방불명인 유족회 공동대표, 김영훈 제주도의회 부의장(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상임대표), 허상수 재경 제주4.3 희생자 및 피해자 유족회 사무국장, 김창후 제주4.3연구소,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장, 신정미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홍근수 양심수후원회 지도의원, 홍범택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이경숙 고양금정굴유족회 간사 등 함평, 광주, 익산, 화순, 강화, 익산, 구례, 함양, 부산 등에서 유족과 사회단체 운동가 50여 명이 참석했다.
경남에서는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대표,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시민사회부 차장, 서봉석 산청군의원, 김영이 지리산 외공리 양민학살 진상조사 및 위령제 추진위 간사가 이 모임에 함께 했다.
2000년 들어 경남에서는 ‘한국전쟁중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경남도대책위원회’(집행위원장 조현기)가 2월 10일 마산 카톨릭여성회관에서 출범했고, 5월 17일에는 창원 카톨릭사회교육회관에서 심포지엄을 열어 당시 전국연합이 제안한 ‘미국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 참여를 결의했다.
참석자들은 심포지엄을 마친 후 진해 미군사고문단 앞을 찾아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 집회에는 황점순 할머니 등 곡안리학살 유족들도 다수 참여했다.
한편 김영만과 김주완, 김영이, 서봉석, 이금숙(거제시민신문 기자), 정성인(경남도민일보 기자), 윤성효(진주신문 기자)는 7월 6일 진주신문사에서 첫 회의를 열어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을 위한 경남지역모임’ 결성에 합의했다. 이후 3차례 더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박영주(경남근현대사연구회장), 전갑생(경남근현대사연구회 연구원), 김한규(하동사랑청년회장), 한관호(남해신문 편집국장), 박동주(사천민주단체협의회 사무국장) 등이 추가로 운영위원으로 합류했다.
이 모임은 9월 20일 창원 카톨릭사회교육회관에서 발족식과 함께 ‘민간인학살문제 왜,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에서는 전갑생이 ‘경남 남부해안지역 민간인학살의 실상’, 조현기 미군 양민학살 경남도대책위 집행위원장이 ‘미군에 의한 경남지역 양민학살의 실상’, 김주완이 ‘경남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의 실상’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김동춘 교수가 ‘민간인학살 문제 왜,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나’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이날 발표에서 김동춘 교수는 “양민학살이라는 용어를 민간인학살로 바꾸자”고 제안했고 참석자들이 수긍했다.
이 모임의 대표간사로는 서봉석이 선출되었다. 또 김영만은 이후 정식 출범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당시 자료집을 보면 이 모임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93명의 명단이 실려있는데, 발기인 모집을 위한 전단에는 다음과 같은 호소문이 실려 있다.
8·90년대 치열했던 민주화투쟁의 과정에서도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현대사의 최대 참극이자 인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50년 전의 대학살이었습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는 경악하고 분노하면서 정작 우리나라에서 100만을 헤아리는 비무장 양민이 집단학살된 사실에 대해선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가해세력은 이 가공할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왔습니다. 그 사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용공으로 몰았으며, 4.19혁명 이후 어렵게 수습한 유골을 다시 파헤치는가 하면 유가족과 그 친인척까지 연좌제로 묶어 사회활동을 제한했습니다.
그렇게 50년이 흘렀습니다. 철저히 강요된 침묵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분야에서 민주화 조치가 이뤄졌으나 유독 이것만은 금기 사항으로 취급됐습니다. 정말이지 지독한 적색 공포증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더 이상 이 문제를 덮어둔 채 인권과 정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순 없습니다. 산청에서, 진주에서, 거제에서, 마산에서, 창원에서... 전국의 모든 산골짜기와 바다에서 아군의 총부리에 죽어간 원혼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고서는 21세기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20세기의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고, 무참히 유린된 인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업에 힘을 모아 주십시오.
민간인학살문제 해결을 위한 경남지역준비모임
이후 이 모임은 민간인학살 관련 전국 위령제와 집회 참여, 공동 조사사업 참여, 유족 증언대회 개최, 학살유해 암매장 터 조사, 함양 민간인학살 희생자 전수조사, 유족 심층 인터뷰 등 다양한 사업을 했고, 경남도청 앞에서 상복을 입고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2001년 8월 9일에는 이 모임 주최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50년의 침묵, 50년의 통한, 이제는 말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걸고 경남지역 민간인학살 유족 증언대회를 열었는데, 100여 명의 유족과 시민이 참여했다.
이 증언대회에는 김동춘 교수와 현재는 고인이 된 채의진 문경유족회장도 참석했다. 증언자로는 노치수, 정재욱, 권판점 등 6명의 유족이 나섰다.
이어 8월 21일에는 거제에서 유족 증언대회를 열었으며, 당일 거제유족회를 발족시켰다.
10월 27일에는 1960년 마산유족회가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열었던 마산역 광장에서 경남지역 합동위령제를 열었다. 이날 위령제는 미군 양민학살 경남대책위와 민간인학살 문제해결을 위한 경남지역모임, 부경유족회 등 3개 단체가 공동주최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유족들을 꾸준히 만나면서 각 지역별 유족회 창립을 돕기도 했다. 이런 노력의 덕분에 2005년 노무현 정부 시절 마침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기본법이 제정되었고,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진실과 화해는 중단되었고 박근혜 정부 또한 철저히 외면했다. 그 후 문재인 정부 들어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으나 다시 윤석열 정부 들어 극우 성향의 위원장이 임명되는 등 진실규명 작업이 또다시 난관에 봉착한 상황이다.
유족들은 고령으로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 이를 어이할꼬.
글·사진 김주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