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듣고 싶은 노래는 「가고파」가 아니다."
"듣고 싶은 노래는 「가고파」가 아니다."
"마산은 「가고파」를 노래하면서 멀리서 마산을 회상하는 사람보다는 마산에 뿌리 박고 마산에서 문화를 꽃피워 줄 시인을 더 기다린다."
위의 글은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발행인이자 한국의 걸출한 출판인 한창기 선생이 기획출판한 명저 <한국의 발견> 마산편(1983)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소제목과 끝문장이다.
40년 전 글이지만, 마치 요즘 이 지역에서 이은상의 「가고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을 예감이라도 한듯한 외침이자 꾸짖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은상을 추앙하며 문학관이며 축제에 그의 이름과 「가고파」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야말로 지역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는데 걸림돌이 된 인물들이다.
그들의 문화예술은 대개 관변에 기대어 있었고, 문화예술 시설 기관장을 정치인의 선거캠프 낙하산으로 채울 때 말 한마디 않고 동조했다. 그들은 입만 열면 '전국 7대 도시'니 '민주성지 마산'을 외치지만 시장과 국회의원이 마산을 망쳐먹어도 찍소리 한 번 하지 않았고, 오히려 민주성지를 수구꼴통 도시로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그들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기회주의자의 전형 이은상을 기를 쓰고 부활시키려는 의도는 뭘까? 바로 자신들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야 권력 언저리를 기웃대며 살아온 자기의 삶이 합리화되니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인간에 대한 시인(詩人)의 태도]
내친 김에 이은상 사진 하나 투척.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노인도 아닌 서른다섯 살 팔팔한 청년 시인 이은상이 지리산을 등반할 때의 모습이다. 제발로 걷는 게 아니라 사람을 부려 저렇게 지게 위에 걸터 앉아 지리산을 유람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이은상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국토 순례기 취재는 이렇게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