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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Sep 13. 2017

어머니는 나의 군대생활이 편한 줄로만 알았다

페친 Wanny Lim 님이 공유한 글 중 이런 게 있었다.

#5전태일이 인권을 외치며 불에 타 죽은 시대에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피부가 뽀얗다고 도시 물이 좋다고 농담삼아 말했다. 실상은 24시간 빔낮없이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느라 일년 사계절도 모르고 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멋쩍게 웃으면서 부모님께 큰 돈을 건네고 다시 서을로 올라와 잠 안 자고 일하던 사람들. 공장마다 일년에 수백명씩 죽어가도 눈 하나 꿈뻑 안하던 세상.(https://www.facebook.com/WannyWorldwide/posts/1307913942561199?pnref=story)


이 글을 읽고 떠오른 생각 하나.


나는 '장남 콤플렉스'가 심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주입받아온 결과였다. 오죽하면 내 이름이 주완(柱完, 집안의 완전한 기둥이 되어라)이었을까. 그게 청소년 시기엔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 땐 정말 부모 속을 참 많이 썩였다. 한동안 불량청소년으로 헤메다 어떤 큰 사건을 계기로 대학에 진학하면서 그냥 그 콤플렉스를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부터 나는 착한 아들이 됐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을 때 나는 늠름한 장남이고자 했다. 휴가를 나와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을 때마다 "요새 군대는 너무 편해요" "밥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반찬도 사회보다 훨씬 잘 나와요" "맨날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먹어요" "그래서 이렇게 살도 쪘잖아요"라고 안심시키곤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자대 배치 직후 아무런 합리성도 없는 무조건적인 명령에 반항하다가 고문관이 되었고, 1급 비밀인 암호를 분실하는 바람(지금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에 보안부대에 끌려가 간첩 혐의를 받으며 다양한 폭력과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야간 벙커 근무 중 하사관들의 비리 사실을 일일이 기록한 일기를 쓰다가 불시 점검을 나온 대대장에게 걸려 별의별 고초를 당한 일도 있다. 그 과정에서 영창도 다녀왔다. 영창에서 겪은 수모와 고통도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군대에서 동기들과 찍은 사진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에겐 그냥 "편하다"는 말만 했다. 왜? 나는 장남이니까. 장남은 늠름해야 하고,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면 안 되니까.


그런데 나와 열 살 차이 나는 막내 동생은 달랐다.(우리 형제 중 아들은 나와 막내 둘이다.) 휴가 나올 때마다 어머니에게 "밥이 모자라 배고프다"는 말을 비롯해 군대에서 겪은 구체적이고도 시시콜콜한 힘든 일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게 막내와 장남의 다른 점이었다. 하긴, 나도 동생의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흥미로왔다. 10년 전 내 군대생활과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었고...


그런데 몇 년 후, 어머니가 동네 할머니들과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나에겐 나름 충격이었다.


"우리 큰아(장남)는 군대생활도 억수로 편하게 했는데, 막내이는 군대에서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짼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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