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검사가 독재권력의 앞잡이가 된 사연

3.15마산의거 용공조작 밝혀낸 한옥신 검사, 박정희의 충실한 개가 되다

by 김주완

3.15마산의거와 4.19혁명 시기만 놓고 본다면 마산시민들이 특별히 고마워해야 할 검사가 있습니다. 바로 경남 통영시 출신 한옥신 검사입니다. 그러나 한옥신 검사는 4.19 이후 박정희 치하에서 독재자의 주구(走狗)가 되어 씼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반헌법행위자라는 점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3.15마산의거 당시 이승만 정권은 마산시민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로 몰아가려 했습니다. 바로 그런 정권의 용공조작 음모를 무력화한 인물이 한옥신 부산지검 부장검사였습니다. 그는 또한 부산 특무대(CIC, 현 방첩사) 요원들이 민간인을 고문 살해한 사건을 밝혀내기도 한 정의로운 검사였죠. 그때까지만 해도 한옥신은 "한국 검찰 역사상 가장 훌륭한 검사"(한홍구 교수의 표현)였습니다.


일단 3.15 당시 한옥신 검사가 경찰의 용공 조작을 밝혀낸 과정부터 한 번 보시죠.




경찰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군중에게 총을 쏴 3월 15일 하루 사이에 9명의 시민을 죽였다. 다음날인 16일 최인규 내무부장관은 진상발표를 통해 "데모군중의 사인은 압사인지 총사인지 모르겠다"고 뜬금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또 최남규 경남경찰국장은 경찰의 발포를 변명하며 당구의 '쓰리쿠숑' 원리를 강변했다. 하늘을 보고 공포를 쏘았는데 그 총알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도중 군중이 던진 돌멩이와 '키스'를 하여 되돌아오다가 군중의 뒤통수에 맞았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경찰의 '북마산파출소 방화 조작'이 이뤄졌다.


경찰이 길가던 스물 두 살의 청년 박세현을 이유없이 붙잡아 그의 소지품 중에서 운전면허증이 발견되자 갑자기 '자동차=휘발유'라는 등식을 적용, 방화범으로 몰아버린 것이었다.


경찰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난데없이 바께스와 유리병·검은 헝겊 등을 가지고 와서 "이 바께스에 휘발유가 든 병을 넣어가지고 와서 북마산파출소에 던진 다음, 솜에 불을 붙여 방화했다고 불어라"며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이렇게 방화범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민주당 도의원 정남규와 그의 아들 정현팔, 그리고 운전수 정상숙 등을 공범이자 지령을 내린 자로 엮어 넣었다. 경찰은 또한 정남규가 1946년 남로당에 가담한 바 있는 공산주의자이며, 박세현은 6·25때 부역자라고 우겼다. 특히 22세의 박세현이 12세 때 부역을 했다는 게 설득력을 얻기 어렵자 그의 나이를 32세로 조작하기까지 했다.


박세현(왼쪽), 정상숙씨가 수갑을 찬 채 현장 검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권과 경찰의 이같은 음모는 용기있는 검사들의 활약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그들은 부산지검에서 마산사건 전담수사를 위해 파견된 한옥신 부장검사와 허형구·서윤학 검사였다.


한옥신 검사는 경찰이 증거물로 제시한 휘발유 바께스와 사이다병 6개, 광목천 등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바께스는 15일밤 경찰이 서성동 주유소에서 빼앗은 것이며, 사이다병과 광목천 또한 경찰이 이웃 식당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혀냈다. 한옥신 검사가 주유소와 식당 주인들의 증언을 들이대자 경찰은 비로소 조작을 시인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경찰은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21일 최남규 경남경찰국장은 이강학 치안국장에게 수사지휘 검사를 바꿔치워야 한다고 건의했고, 자유당 당무위원회에서도 "한옥신이 민주당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으니 바꿔치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 검사팀은 경찰의 조직적인 반발에도 불구하고 발포경관들을 구속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25일 오후 5시 30분 한 검사는 허형구·서윤학 검사 및 이홍우 수사관 등과 함께 구속영장을 준비하여 마산경찰서로 갔다. 그러나 영장이 발부된 경찰관들은 이미 숨어있는 상태였다.


한 검사는 손석래 경찰서장을 만나 "국회조사반의 조사내용을 알아서 보고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으니 경찰관들을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한 검사는 손 서장이 의심하지 않도록 구속할 경찰관 5명을 포함한 15명의 명단을 내놓았다.


얼마 후 별다른 의심없이 명단에 포함된 경찰관들이 서장실로 들어오자 검사와 검찰수사관은 기습적으로 5명의 경찰관에게 수갑을 채웠다.


이 때 구속된 5명은 박종표 경위(마산경찰서 경비주임) 김종복(남성동파출소 주임) 주희국(마산경찰서 수사계 형사) 이종덕(마산경찰서 수사주임) 이종한(북마산파출소 순경) 등이었고, 혐의는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이었으나 이후 허형구 검사에 의해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죄명이 바뀌어 기소됐다. 이 일로 인해 마산사건을 공산폭동으로 몰아가려던 경찰의 음모는 좌절됐다.


이들 검사는 또한 경찰이 숨진 시위군중의 호주머니에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유인물을 넣어놓고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몰아가려던 음모도 밝혀냈으며, 김주열 열사의 시체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유기한 범인이 마산경찰서 박종표 경위라는 것도 밝혀냈다.


3.15 마산사건의 진상은 이렇게 왜곡되었었다-백일하에 폭로된 경찰제 오열, 희생자 주머니에 조작 삐라 투입



이랬던 한옥신이 박정희의 충실한 개로 전락한 데는 사연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검사의 특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한옥신에게는 어릴 때 함께 자란 김임종이라는 이종사촌 동생이 있었는데, 1960년 4.19혁명 직후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김임종이 한옥신을 찾아왔다. 그런데 이 간첩을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한옥신이 집에서 하룻밤 재워준 데서 일이 꼬였다.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에 꼼짝없이 걸린 것이다.


한옥신이 간첩과 접촉했다는 당시의 언론보도 @한홍구 교수 유튜브 캡처


그때 차라리 기소되어 처벌을 받았다면 반헌법행위자로 역사의 죄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첩 김임종과 접촉한 다른 인물들은 모두 기소되었으나 유독 한옥신만 검사의 특권으로 사법처리를 면하는 대신 내부징계 6개월 감봉으로 마무리되었던 게 나중 문제가 되었다.


1961년 5.16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에게 꼬투리를 잡혀 한옥신의 영원한 족쇄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박정희 정권에서 갑자기 변절한 한옥신은 수많은 공안사건에서 권력의 충실한 개가 되었고, 61세에 지병으로 죽기 전까지 검찰의 핵심요직은 물론 치안국장(현 경찰청장)과 유정회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누렸다. 그 시절 한옥신의 반헌법행위 죄상은 다음과 같다.


1심에서 무죄가 나온 인혁당 사건에 대한 검찰 항소장. 한옥신의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다. @한홍구 교수 유튜브 캡처


-1964 인혁당 조작사건, 다른 검사들의 반발 사표에도 불구 한옥신이 공소 유지

-1965 군원로 호소문 사건, 민비연 사건, 한독당 사건 내란음모로 조작 지휘

-1967 6·8총선에 경찰력 동원해 부정선거

-1968 파기환송된 동백림 사건, 간첩 개념 확대해 공소 유지

-1968 범죄 우범자에게 재판 없이 강제 노동 부과

-1968 두 번 납북된 어부에게 탈출죄 적용, 사형 구형 지시

-강제노역, 강제전향, 보호처분 논리 정립해서 사회안전법, 형제복지원 등 토대 마련


자세한 내용은 곧 출간될 <반헌법행위자열전> 제3권을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