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열사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편지 전문

by 김주완

어제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이야기를 올렸더니 많은 분들이 공감, 공유를 해주셨는데요. 글 속에 인용했던 권찬주 여사의 편지 전문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어서 올려드립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https://brunch.co.kr/@brunch699f/285


참고로 권찬주 여사는 2022년에야 진실화해위원회에서 3.15의거 참여자로 인정했고, 2023년 국가보훈부에 의해 4.19혁명 유공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산의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와 김영만 상임고문이 큰 역할을 했죠.

0002866120_003_20250606141826043.jpg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



1960년 5월 권찬주 여사가 마산시민에게 보낸 편지(전문)


마산시민 여러분!

그리고 전국의 어머니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자식 주열이가 죽은지 거의 한 달 동안이나 걱정해주신 끝에 지난 4월 11일 다시 마산에서 의거를 일으켜 나라를 바로 서게 해주신 여러분에게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바입니다.

자식 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남은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것 있겠습니까.


김주열 열사 가족 사진. 어머니 권찬주(아래) 여사와 셋째아들 택열, 첫째 아들 광열, 넷째 아들 길열씨. 김길열씨 제공1.jpg 김주열 열사 사후 가족 사진. 어머니 권찬주(아래) 여사와 셋째아들 택열, 첫째 아들 광열, 넷째 아들 길열씨.


이 나라의 어머니 여러분!

우리는 어머니로서 자식을 길러 나라에 바치는 것이 어머니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3.15의 밤 제 자식 두 형제가 함께 제1차 마산의거에 참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주열의 형 광열(19. 올해 고교 졸)이도 함께 참여했다가 창원군 진동고개까지 쫓겨갔던 사실을 빨갱이로 모는 바람에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광열이는 그날 밤 마산시청 근처에서 동생 주열이를 돌아볼 새 없이 총을 피해 진동 가는 고개까지 갔더랍니다.

고개까지 쫓겨갔던 학생들이 정렬하여 번호를 불러보니 모두 29명이었답니다. 산길을 걸어서 16일 새벽 2시 30분경 광열이는 겨우 장군동의 그의 할머니집(저의 이모 안영자. 58)까지 찾아왔었습니다.


산에서 어느 동네로 내려오니 어떤 아주머니가 광열이더러 "가지 마라 순경에 잡혀간다"고 주의도 시켜주더랍니다. 돌아와 보니 주열이가 없어 걱정 끝에 17일 남원으로 왔던 것입니다. 아주 주열이 마산상고 합격증을 받아 쥐고....


광열이가 총부리에 쫓겼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주열이는 바다에 던지지 않았으면 화장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며, 날마다 바닷가에 나와 앉아 '주열아! 어디 갔니?' 얼마나 울었던지....


마침내 주열이는 오른쪽 눈에 쇠가 박힌 채 4월 11일 바다에서 떠오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이날의 마산 제2의 사건과 주열의 시체가 떠오른 사실을 저는 다음날 12일 남원집에서 신문을 보고 알았던 것입니다. 이날 경찰지서에서는 주열의 인상착의를 물으러 왔으며 주열의 소식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남원시내의 동아일보 지국을 찾아갔습니다.


"나는 시체를 못받겠으니 이기붕이 집에 갖다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지프차가 썩 닿더니 경찰관이 어디론지 데리고 가는데 가보니 검찰청이라고 하면서 시체인수증에 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은 시체가 마산에 넘어가면 또 데모가 나고 막 부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면 좋다. 시체가 넘어오면 남원서도 서울 가는 길이 있으니 열두 번이라도 갈 수 있다"고 쏘아 주었습니다.


그들은 저의 뒤를 따르고 광열이를 꼼짝 못하게 하였습니다. 변소에 가도 찾았습니다. 광열이는 대문을 주먹으로 치면서 분해서 못견디곤 하였습니다.


4.19의거 때 데모 선동죄로 잡혀갔던 우리 집안의 손자이며 주열의 5촌 조카가 되는 고대 1년 수철(秀哲)이는 "할머니, 주열의 죽음을 원통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런 죽음이라면 나도 당장 죽겠소"라고 위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수철이는 모진 고문을 당해 집에서 개도 잡아먹으며 치료 중인데 주열의 시체에 관한 저의 편지를 받고 그는 서울 '데모'를 선동했던 것입니다.


주열의 49재를 지난 음력 사월 초파일(5월 3일) 남원산성 대복사에서 지냈습니다. 많은 남원시민들과 기관장이 참석하고, 민주당원 6명은 밤을 새웠습니다. 참석인들이 하도 서러워하여 저는 눈물을 흘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통곡한다면 참석한 그분들의 울음이 터져 나올까봐 두려웠습니다.


저의 자식도 샤스(셔츠) 바람에 죽었고, 이기붕이도 죽었으니 원한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백명을 때려죽인들 죽은 자식이 살아나겠습니까.


어미 자식간의 인정으로서는 보고 싶은 마음 어찌 다 말하리요마는 나라일을 잘 보라고 길러서 나라일로 죽었으니 이제 저의 임무는 살아남은 자식을 잘 키워 더욱 나라일을 보게 하는 것으로 압니다.


하루속히 선거나 다시 해서 나라가 바로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이 나라 어머니 여러분!

그리고 마산시민 여러분의 그 거룩한 뜻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놈들이 그같이 악독하게 죽였지만 죽인 그놈들은 벌을 받을 것이요, 내 자식은 신선되어 올라갔을 것입니다.


마산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부디 몸 건강하시길 5백리 서쪽 지리산 고개너머서도 빌어마지 않겠습니다.


1960년 5월 8일 어머니날에 권찬주(權燦株)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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