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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Mar 13. 2022

언론 자유가 꼭 좋은 언론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부마민주항쟁 당시의 언론과 민주화 이후의 언론

6월항쟁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언론


1991년 10월 10일, 나는 지역신문에 입사한 지 1년 6개월 된 초짜 기자였다. 총학생회장 선거 투·개표가 진행 중인 진주전문대(현 한국국제대)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택시를 탔다.

학생운동권 후보와 비운동권 후보가 맞붙은 선거는 이미 유세 과정에서 분위기가 험악했다. 여학생들이 많았던 운동권 후보 쪽 지지자들은 상대 후보 쪽 남학생들로부터 “너희가 이기면 다 죽여버리겠다”라거나 “강간을 해버리겠다”라는 협박까지 받고 있던 터였다.


택시 안에서 나는 상대 후보 쪽의 투표함 탈취 또는 개표 방해를 연상했다. 하지만 오후 4시 30분 도착해서 본 현장은 전혀 딴판이었다.


개표장과는 거리가 있는 C동 101호 강의실 앞은 수많은 학생이 몰려와 있었고, 강의실 안에는 각목을 든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비운동권 후보 지지자)이 기세등등한 자세로 바닥에 꿇어앉은 경상대(현 경상국립대) 학생 30~40명의 ‘군기(?)’를 잡고 있었다. 고개를 들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면 거침없이 발길질과 각목 세례가 가해졌다.


곧이어 후문 담장 밖에 경찰의 ‘닭장차’가 도착했다. 이 학교 교수·학생들과 경찰이 모종의 협상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강의실에 ‘감금’당해있던 경상대 학생들이 예의 각목을 든 청년들의 감시를 받으며 머리에 양손을 올린 채 ‘오리걸음’으로 줄줄이 끌려 나왔다. 그렇게 후문에 도착한 학생들은 ‘닭장차’로 고스란히 경찰에 연행됐다. 모두 33명이었다.


상황이 끝난 후 나는 이를 지켜보던 이 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취재를 시작했다.


선거 전날인 9일 진주전문대 선거유세 과정에서 양쪽 후보 지지자들 간에 욕설과 폭언 등 다툼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진주·충무지역총학생회협의회(진충총협, 의장 이일균 경상대 총학생회장)에 접수됐다.


이튿날인 10일 오전 진충총협은 이 학교 선거개표 후 폭력사태가 예상된다며 급히 경상대에서 사수대를 모집, 40여 명을 진주전문대에 파견했다. 이들 경상대생은 오후 3시 30분 진주전문대에 도착, 개표장과 떨어진 강의실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며 이 학교 학보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후 4시쯤 운동권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정될 무렵, 갑자기 강의실 유리창이 깨지면서 앞문과 뒷문으로 15명 가량의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경상대생 중 한 명이 비닐봉지에 싼 최루가루를 뿌렸고, 몇몇은 강의실 밖으로 도망갔다.


이 과정에서 경상대생들은 천막 가방 속에 넣어 간 쇠파이프를 미처 꺼낼 사이도 없이 모두 빼앗겼고, 각목과 책걸상, 빼앗긴 쇠파이프 등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완전히 제압당한 경상대생들은 강의실에 꿇어앉은 채 진주전문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이 학교에 들어온 경위 등에 대한 진술서를 썼다. 이 진술서와 쇠파이프, 최루탄 등은 모두 ‘증거품’으로 경찰에 인수인계됐다.


여기까지가 내가 직접 목격했거나 취재한 진주전문대 사건의 진실이다. 팩트만 놓고 본다면 폭력사건의 가해자는 진주전문대 학생들이고, 경상대생은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감금당한 피해자다. 쇠파이프와 불발최루탄 등 무기를 가방 속에 넣고 남의 학교에 들어간 점을 감안한다 해도 최소한 쌍방폭행이 되어야 옳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완벽히 바꿔치기 한 언론


그러나 다음날부터 쏟아진 언론보도는 경악할 정도였다. 11일 자 <동아일보> 보도는 이랬다.

“10일 오후 5시 반 경 진주시 하대동 진주전문대 201호 강의실에서 진행된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개표장에 경상대 써클인 지리산결사대 소속 유형민 군(19·경상대 무역과 1년) 등 대학생 33명이 쇠파이프와 최루탄을 갖고 들어가 20여 분 동안 난동을 부렸다. 경상대생들은 진주전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 후보인 천재동 군(19·전자계산과 1년)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 강의실 유리창 2장을 깨고 들어가 최루탄 1발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6하원칙’ 중 단 하나도 맞는 게 없다. 완벽하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치기했고, 사건의 동기와 원인, 발생시간, 장소는 물론 총학생회장 당선자인 천재동의 나이까지 틀렸다. 그는 1학년이지만 늦깎이 입학으로 24세였다. <동아일보>를 예로 들었지만, 서울언론과 지역언론 가릴 것 없이 모든 언론이 이렇게 보도했다.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 그날은 오후 늦게 발생한 일이라 미처 취재할 여유가 없어 그랬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 보도는 더 가관이었다.

경찰은 이들 경상대생이 소속된 ‘지리산결사대’가 “일본 적군파의 초기조직 형태로 빨치산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대원 가입 때 화염병 투척훈련을 받고 지리산 도보종주 등 극기훈련을 받으며, 시위를 극렬하게 유도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무장결사”라고 발표했고, 양 방송사까지 가세해 경쟁적으로 ‘경찰이 밝힌 지리산결사대 정체’ ‘극렬.소수화 운동권의 전위대’ 등의 특집 해설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런 언론의 응원에 힘입어 검찰과 경찰은 이른바 전국 대학의 학생운동권 ‘전위조직’을 일망타진하겠다며 전남대 오월대, 조선대 녹두대, 부산대 시월대 등 공안사건을 연이어 터뜨린다. 이 과정에서 언론의 ‘취재’는 없었다. 오직 ‘받아쓰기’만 있을 뿐이었다.


부마항쟁 때는 못나갈 기사라도 취재는 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 때는 군인들이 아예 신문사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보도를 막았다. 하지만 그 시절 기자들은 신문에 낼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다. 다음은 당시 <경남신문> 남부희 사회부장의 증언이다.

“썼죠. 아셔야 될 게, 저들이 보도 삭제를 할 거라고 해서 미리 (기사를) 안쓰지는 않았습니다. … (중략) … 심지어는 취재했던 노트까지 군부에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원본까지 제출하라고요. 못 낸다고 버티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취재한 자료를 집대성해야겠다는 절박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이틀 동안 8회분 정도를 썼어요. 그 당시에 자료를 흩어지게 내버려 뒀다면 영원히 빛을 못 봤겠죠.”(『부마민주항쟁 증언집 마산편1』, 2011)


그렇게 작성된 8회분의 기사는 10년이 지난 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기증됐다. 1987년 6월항쟁 때도 그랬다. 3만여 시민이 시위를 벌였던 마산 6·10항쟁을 ‘한(韓)·에(埃) 축구경기 중단 / 차량방화 기물 파손’ ‘마산서도 시위…시민반응 냉담’이라고 보도해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던 당시 <경남신문> 기자들도 취재를 포기하진 않았다. 그렇게 남은 취재자료는 후일 나에게 전달됐고, 『80년대 경남 독재와 맞선 사람들』(김주완 지음, 피플파워, 2020)이라는 책을 쓰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됐다.

그런 6월항쟁 덕분에 보도지침과 사전검열이 폐지되었음에도 1991년 진주전문대에 언론의 취재는 없었다. 사실보도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언론이 자발적으로 경찰의 공안조작에 가담해 공범이 되었던 것이다.

언론의 자정에만 맡겨둘 순 없다


이 사건은 언론자유가 반드시 좋은 언론을 보장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런 사례는 이후에도 차고 넘친다.


2013년 4월 당시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진주의료원 노조를 ‘강성 귀족노조’라 매도하면서 “1999년에는 노조가 원장을 감금하고 폭행했다”는 거짓말을 반복했다. 언론은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볼 생각은 않고, 그대로 ‘받아쓰기’만 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오히려 원장이 주먹을 휘둘러 간호사 노조원들을 폭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홍 지사의 말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때 ‘전원구조’ 오보도 그랬다. 거기에도 ‘취재’는 없었고 ‘받아쓰기’만 있었다. 기자들은 ‘기레기’가 되었다.


심지어 2015년 5월 6일 종편 채널A는 세월호 추모집회의 폭력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2008년과 2003년 사진을 세월호 집회 사진으로 둔갑시켜 내보냈다. ‘받아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사실을 ‘조작’까지 한 것이다.

세월호 관련 언론 오보 일지 @경남도민일보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기꾼으로 구속돼 실형을 살고 있는 범죄자의 일방적 뇌물 주장을 아무런 검증 없이 앵무새처럼 옮기는 언론, 정치인의 뻔한 거짓말을 ‘공방’ ‘논란’으로 포장해 보도하는 언론에도 취재는 없다.


기자의 본분은 ‘취재’이고, 취재의 기본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세월호 전원구조’ 발표가 나왔을 때 “구조된 학생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묻고 확인했다면 그런 희대의 오보는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보를 넘어 조작까지 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언론의 ‘자정’을 기대하긴 어렵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의 93세 노인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정 독립적인 언론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참여하는 일, … 그건 비단 정치인들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치러야 할 전투이다.”


그렇다. 시민이 나서 정치인들에게 요구해야 한다. 강력한 언론개혁법안을 내놓으라고.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소식지 '시월' 202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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