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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uchi Feb 10. 2016

좌충우돌 뉴미디어 창업기 #1

[김경달 - 네오 터치포인트] 배경 - 대학시절 & 사회생활 초년기 

#2015 3월말의 기록

 

사표를 썼다

아니엄밀하게 말하자면 (주식회사 네이버의 인트라넷에서) '사직원 기안을 전송'했다.

불과 얼마 전인 2015 3 초의 

자발적 해고다

1993 사회생활 시작한 이래 다섯 번째 새로운 둥지를 찾기로 결정한 것. 

이제 벌써40 후반,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무모한 도전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직접 둥지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다창업이다

20 남짓 봉급쟁이로 살면서 남의 이야기로만 여겼던 창업을 직접 하게  것이다.

 

"그래서, 뭘 하려고 하시나요?"

창업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이것부터 묻는다.

"모바일 시대잖아요. 그것도 이제 막 진입하는 초기이고요. 새로운 콘텐츠도 만들어보고 싶고, 가능하다면 미디어 실험도 해보고 싶어요."

 

어떤가좋게 말하면 뭔가 낭만적이라 하겠고, 냉정하게 보면 '철없는 이야기' 같이 들릴  같다

그래도  같은 결심을 하기까지 뭔가 이력이나 사연이 있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도 한번 정리는 해보고 싶었던 내용이다

그래서 끄적임 수준으로 정리했던 글을 우연히 지인이 보았고 어찌하다 보니  원고 청탁으로 연결됐다

따라서   '좌충우돌 창업기'는,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야기임을 먼저 고백한다.


대학시절 뉴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싹 트다

 

80년대 후반 대학시절(필자는 87학번이다), '국제 커뮤니케이션론'이란 수업을 들었다. 

수업은 통신환경의 변화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다뤘다

딱딱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조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내용이 있다

교수님께서 "태평양 바다를 가로질러 케이블 선이 깔려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것"이라는, 언뜻 SF 영화의 이야기 같은 말씀을 한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은 가까운 장래에 미국 할리우드 영화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영화를 사볼 수도 있을 겁니다."

 말을 듣고 '그것 참 멋진 일이네'라고 생각했다.

"그럼 돈은 어떻게 내나요?"

나도 모르게 질문도 나왔다.

교수님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씀하셨다.

"그거야, 신용카드 같은 걸로 처리하면 되겠지"

그날 이후였을 것이다. 막연하게나마 뉴미디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리고 훗날 인터넷 업계에서 일하면서 그날 기억은  깊게 새겨졌던 듯하다. 


대학시절, 필자는 방송국에서 2년 반가량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운 좋게 미디어 현장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대학생들이 출연하는 퀴즈 프로그램에서 FD(Floor Director) 맡아 경험을 쌓았고

한동안은'우정의 무대'라는 군대 위문공연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Scripter) 했었다.

군대로 출장을 다니던 막내 작가 시절은 4학년 2학기였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중간고사를 치르던 무렵,문득 '공부를 더 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휴학했고11 중순 군대에 갔다.


28개월 반, 힘든 암흑기였지만 여기서도 대학 전공 덕분에 나름의 미디어 경험을 쌓을  있었다

신병교육대 정훈 조교를 맡게  필자

'한반도 전쟁 위험사라졌는가등의 영상물을 활용해 안보교육을 주로 했다

물론 교육 시간 대부분은 온통 졸기만 하는 신병들을 얼차려 주다 끝나기 일쑤였다. 

매일 기상나팔 방송과 취침 방송 또한 업무였다

주임상사께 양해를 구해 취침방송 시간에 팝송과 가요를 맘대로 선곡해 틀기도 했다

열혈 청취자가 늘면서 잠을  자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얼마  가 중단됐지만 제법 유쾌한 경험이었다

피드백의 소중함은 군대에서도 통했다.

병장 시절,군인 대상 프로그램인 '우정의 무대' 우리 부대를 찾았다. 

종전에 제작진 입장에서 쉽고 편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수많은 장병들이 오랜 시간 동안 땀 흘렸기에 가능했음을 깨닫게 됐다

좋은 컨텐츠를 만드려면 탁월한 기획도 필요하지만, 

가용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하는  매우 중요함을 배울  있었다.


미디어 현장에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의 시작

 

복학 ,방송사 PD 되고자 준비했다그러나 번번이 떨어졌다

연말이 가까웠고 좌절하던 무렵,때마침 케이블TV가 등장했다

나는 93년말 어린이 방송을 준비하던 케이블TV방송사에 공채 PD 1기로 입사했다.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방송사는 94 개국을 앞두고 준비 단계였다. 

처음  달간 오전에는 영상원으로 가서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회사로 와서 현업을 익혔다

어린이 다큐 프로그램 조연출이 됐다

더워질 무렵,설악산 암벽등반을 소재로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한 출장을 가게 됐다

Beta 테이프 스무개를 신청했다.수령하려고 가니10개만 있었다

이유를 파악해보니, 총무부서 조직장의 지시였다.

"절약하자. 10개만 갖고 가서 아껴 쓰며 좋은 작품 만들어 오면 좋겠다"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 .

설악산 아래쪽에 봉고차를  놓고 암벽을 향해 산을 오르며 촬영했는데테이프를 아끼느라 경사도 심하고 험한 산행 길을 혼자 두 번이나 뛰어서 왕복하게  불상사가 생겼다. 

출장 후 종합 편집을 마치자마자 사표를 던졌다

이후에도 나는 가끔씩 꿈에 설악산을 오르내렸고 그때마다 땀을 줄줄 흘리며 잠을 깨곤 했다.

 

그렇게  직장을 관둔  고시원에 들어가 PD 시험을 다시 준비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 먼저 시험을 봤던 신문사에 덜컥 합격했다

기자 생활은  다른 신세계였다

사회 곳곳에서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제각기 독특한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걸 목격했다

 이야기들을 종합해 전달하는 작업은 무척 즐겁고 보람찼다. 술이 늘면서 담력도 커졌다. 

경찰서 형사가 형제처럼 가까워지기도 했고,쉽게 만나기 어려운 유명인들을 인터뷰하며 뿌듯하면서도 우쭐한 기분에 취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취재가 아니었다. 

당시 증면 경쟁 속에서 64면까지 늘어나다 보니 취재 나갈 시간은 부족해지고 출고할 기사 부담은 늘어만 갔다.기사는 발에서 나와야 하는데, 머리를 쥐어짜서 쏟아내고 있었다. 

회의감이 몰려왔다

'이렇게 빼먹기만 하고 채우질 못하면,  방전되지 않을까'싶었다

, ' 글과 사진으로만 전달을 해야 하나그냥 동영상 클립 하나 보여주면 될 내용들도 있는데…'라는이를테면 포맷 제약에 대한 아쉬움도 컸다. 

당연히 참고 넘기면 되고,  그래야  일이었다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모한 도전,#1 

 

뉴미디어를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가득했던 그때, 

우연히 미국에 유학간 후배로부터 괜찮은 대학원 과정 프로그램을 소개받게 됐다

여차여차 유학 준비를 하게 되고  좋게도 합격 통지서도 받았다. 

7 가까이 몸담았던 신문사를 그만두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별 결정은 순식간이었다

유학자금 마련을 위해 IMF 사태 후반에 조금 무리해서 장만했던 집도 팔았다

지금  돌이켜보면무모하고 이기적인 도전이었다

둘째 아이는 태어난 지 백일 남짓했을 무렵이었다.

 

뉴미디어를 공부하러 간 뉴욕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학하자마자 '9.11'테러가 터진 것이다테러로 인해 일주일간 학교가 문을 닫았다

하필 IMF 겪으며 미국 뉴욕특파원을 없앴던  직장에서는 연락이 빗발쳤다

필자는 특파원은 아니지만 현지 유학생 신분으로 전화와 메신저 인터뷰에 응했다

며칠간 병원을 쏘다니고 실종자 가족 인터뷰를 해서 취재 내용을 국내 매체에 기고하기도 했다

탄저균 테러 위험 등이 연일 보도되는 살벌한 분위기가 한동안 이어졌지만,다행히 사고는 없었다.

수업 가운데 인상적인 게  가지 있었다. 

먼저 'interactive storytelling'. 더글러스 러시 코프라는 작가를 겸하는 분이 강의를 하셨다

 수업이 기억난다수강생은 다국적으로 16명가량이었는데 각자  연극에서 인상적이었던 대사를 하나씩 골라 적어내야 했다. 그리곤 4명씩 조를 짜서, 각자 그 대사만을 조합한 간단한 상황극을 하게 됐다

신기한 것은,수업 참가자 대부분이 각 팀의 상황극을 볼 때마다 일정한 형상의 스토리 흐름을 이해하는 경험을 했고퍼포먼스가 끝날 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interactive TV' 수업은 종강이 생방송 실습이었다.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대결구도의 프로그램이었다

웹사이트를 연결해서 기숙사 친구들이 접속해 투표에 참여했다당시로선 이색적인 시도였다

투표가 제대로 이뤄지고 방송에 반영도  됐을  모두가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졸업 무렵'Public Space Design'이란 과목에서 힌트를 얻어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구상하기도 했다. 

주요한 아이디어는,광장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을 활용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입력하면  데이터를 집합적으로 반영해 이미지로 보여주는 방식의 미디어 설치물 구상이었다.

졸업을  학기 남겨둔 겨울,인터넷 포털Daum쪽과 미국에서 인터뷰를 갖게 되었다창업자이자 대표인 이재웅님과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시애틀로 항공편으로 함께 이동한  저녁자리를 가졌다. 당시 Daum 미래 성장 전략에 대한 고민이 깊었고 Think Tank라는 전략조직을 만들기로 해서 사람을 찾고 있었다. 비행기 안과 해산물 레스토랑, 근처 바 등에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며 서로 동감이 많이 됐고 자연스레 합류를 약속했다.

 

졸업과 함께 귀국하자마자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서비스 총괄조직인 서비스위원회 산하 서비스전략팀장이 첫 보직이었다.

아울러 Think Tank TF 업무도 겸했다대체로 미디어사업을 중심으로 미래전략을 고민하는  주된 일이었다. 그러다 제주도로 본사를 이전하는 프로젝트도 맡게 됐다. 

2004 4제주로 갔다. 

당시엔 사내 연구조직인NIL 16명이 선발대로 내려가 애월읍 유수암리의 한 펜션을 사무실로 삼아 일하고 있었다. 

2014년 8월, Daum 펜션에 노무현대통령이 방문했었다.   (맨 왼쪽이 필자)


 2년간 제주에서 살면서 서울을 오갔다. 

건물도 새로 지었다제주시에서 제주대학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등동이란 동네가 있는데 이곳의 부지가 무척 좋게 보였다. 건설사에서 건축 전문가도 스카우트해서 함께 무더위와 추위를 견뎌가며 건축의 대장정을 실행했다. '즐거운 실험' 취지에 걸맞게 설계도 실험적 시도가 많았고 공간 분할과 함께 건축면이 늘어 비용 부담도 제법 있었다건물을 둘러싼 나무 외벽은 아름다운 물결 모양의 곡선 구간도 있었고어느 주말엔가 그 모양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워 제작업체랑 목업(mock-up)을 놓고 고심한 기억도 새삼 떠오른다.  


새로 지은 건물은'글로벌 미디어 센터' 명명됐다.당시 미국 보스턴에 있는 검색서비스 회사를 인수했던 터라 글로벌 컴퍼니의 비전을 담은 이름이었다뉴미디어 작품 공모전을 진행하고 작품3개를 뽑아 장기 전시를 했다. 1층에는 illy 커피 관계자를 설득해 카페를 유치했다.

옥상 층에는 프로젝트룸을 만들었다. 이를 스튜디오처럼 활용해 글로벌 캐스팅을 해보자는 야심찬 아이디어도 있었으나 불발됐다창업자는 미디어에 관심이 많았다 때는 조그만 방송사  곳을 인수해볼까 검토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2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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