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딸들]_그 거룩함에 대하여

나는 그분의 핏줄이니까,

by 차가운 열정

'세상의 모든 딸들'.

제목에서부터 벌써 알 수 없는 연대감에 '저요, 저요, 딸 여기 있어요.' 하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딸로서의 한없는 애정과 공감에 전율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딸'들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과 그들의 대척점에 있을 법한 '아들'들이나 '아버지'들, 혹은 그 남성들로 대변되는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다 읽어보고 생각해볼 만한 대작이다.




2만 년 전.

이제 막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피우면서 수렵 채취 생활을 하던 선사시대, 춥고 광활한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야난'은 젊은 나이에 수렵과 정착을 반복하며 이동하던 중 아이를 낳다 과다출혈로 죽은 그녀의 어머니처럼, 홀로 추위와 진통을 견디며 야외에서 출산을 한 뒤 곧장 죽음을 맞이했다. 이게 끝이다. 그럴듯한 해피 엔딩이라든가, 적어도 '어머니처럼은 살지 않을 거예요!'라는 딸의 단호한 외침 같은 것을 기대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는 그냥 그렇게, 엄마랑 다를 바 없게, 어쩌면 엄마보다 더 못하게 그냥 죽는다. 엄마는 그래도 딸을 둘이나 낳아서 잘 길렀고, 셋째에서 실패했지만, 야난은 첫 아이를 출산하고 그대로 죽었으니 '실적'으로 따지면 엄마보다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죽음이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혼자서는 절대로 생존할 수 없는, 짐승들과 먹거리와 은신처를 두고 서로 경쟁해야만 하는, 힘과 지혜를 두루 합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부족 중심 사회에서 죽음은 물론 실패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짐승 같은 생존 투쟁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혈통의 명예심과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 작품이 생동감을 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난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레이랙 아저씨네 가족과 야난의 가족이 같이 사냥을 하며 생활할 때에만 해도 땔감이나 줍고 더 어린 여동생 메리를 돌보는 일밖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마찬가지로 어린 그레이랙 아저씨네 아들인 티무와 조카인 화이트폭스와 각각 약혼이 되어 있었다. 당시의 아들은 사냥꾼이었다면 딸들은 출산과 육아를 통해 부족의 맥을 이었다. 종종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 지도도 없이 강과 숲을 더듬어 사람들의 흔적을 좇아 목숨을 무릅쓰고 이동하기도 했고, 서로의 평화 협정을 위해 다른 부족끼리 결혼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서너 살밖에 안 된 메리 같은 아이들도 종종 완판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사냥 동료와 오두막이었던 아버지와 그레이랙 아저씨.

두 집안의 끈끈한 연합은 생존의 필수 과정이었지만 사소한 고집으로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잠시 그레이랙 가족을 떠나기로 한다. 그리고 이동 중 출산한 어머니와 아기가 비참하게 죽었다. 아버지의 둘째 아내 요이 이나와 아버지의 조카들은 여우에게 물린 상처가 덧나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두고 먼저 부족이 있는 곳으로 떠나버린다. 추위와 굶주림에 남겨진 야난은 결국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메리와 함께 눈길을 헤쳐 나아가다가 늑대의 동굴에서 겨울을 나게 된다. 그곳에서 야난은 여성으로서는 도전해보지 못했던 사냥을 시작하고 종종 늑대와 협업하며 생존에 성공한다. 그리고 첫 월경을 하며 서서히 여성이 되어갔다.



힘겨운 겨울을 보내고 그레이랙의 오두막에 도착했다.

이미 티무는 다른 아내가 있었고 부모님이 약속한 메리의 결혼 상대자도 화이트폭스가 아니라 낯선 매머드 사냥꾼인 스위프트로 바뀌어 있다. 그레이랙은 야난의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야난을 아들 티무의 둘째 며느리로 맞이한다. 드디어 야생 짐승 같은 생활은 끝났지만 오두막의 안락함은 질서와 권위에의 순복을 동시에 요청했다. 하지만 야난은 용감하고 성실하게 성년식을 치르고 강인한 여성으로 거듭났다. 자신이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뛰어난 지혜와 정신력을 가진 한 사냥꾼으로서, 혹은 당시 구석기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드러내며 존재감을 입증했다. 남자 어른도 혼자 하기 어려운 순록 사냥을 혼자 해낸 것이다. 물론 같이 지냈던 늑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야난을 충분히 설득하지 않은 채로는 더 이상 일개 노동력으로서나 임신한 첫째 아내를 대신하여 몸을 내어주는 파트너로서 찌그러져 있도록 할 순 없었다. 처음 티무와의 신혼 생활은 달콤했지만, 무지하고 어린 신부 야난은 자신이 임신한 것도 모른 채 이유 없는 짜증과 피로감으로 티무와 싸웠다. 결국 극도로 감정이 북받쳐올라 스위프트와 메리까지 파혼시킨 뒤 티무는 자기 몸 상태가 어떠한지도 모르고 그레이랙 일가를 떠난다.




야난은 아버지의 둘째 아내인 요이 이모를 찾아 나섰다.

화이트폭스는 메리를 따라나섰고, 티무의 형제인 엘르는 아내와 아이가 있었지만 야난을 따라나섰다. 엘르는 호시탐탐 야난을 노렸고, 단 한번 야난은 순전히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 엘르에게 몸을 맡겼다. 이후 요이 이모를 만나 자신이 임신한 걸 알았을 때 야난은 그게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친족끼리 범하여 아이를 가질 경우, 그 아이는 출산할 수도 없고, 혹 출산하게 되더라도 곧장 죽였다. 그들의 할머니 샐리가 그런 부끄러운 일로 지금도 영혼이 되어 자신의 죽은 아기를 껴안고 오두막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그런 잔혹하고도 선명한 그들만의 관습에 야난은 두려워했고 샐리처럼 살지 말아야지, 다짐했건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 죄책감이 더해갈수록 아이가 티무의 아이이길 간절히 바라게 되었고 그 갈등 가운데 다시 한번 남편과 그의 오두막이 그리워졌다.



야난은 남편 티무네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티무의 어머니 틸은 야난의 뱃속 아기가 자랑스러운 혈통일 것이라고 믿었고, 야난과 엘르의 죄에 대해 그들과 같은 혈통인 틸 자신과 메리까지 함께 피 흘림으로써 씻어 정결하게 해 주었다. 티무는 아직 의심했지만 야난은 점점 아이의 아빠가 티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티무의 용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혹독한 겨울에 초산의 고통을 야외에서 홀로 견뎠다. 그 사이에 스위프트가 찾아와 야난에게 청혼한다. 별로 좋은 타이밍도 장소도 아니었지만, 그간 당당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운명을 찾으며 누군가의 아내이든 아니든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강인한 여성 야난을 눈여겨봐왔던 것이다. 불륜으로 남편에게 거의 버림받다시피 한 상태로 그의 아기를 낳는 진통 중에 받은 청혼이 합당한 것 같진 않지만, 혹여 그런 상황이 힘들다 할지라도 끝까지 힘을 다해 출산하고 이후 시간을 함께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실은 야난이 비록 엄마처럼 출산으로 인한 속절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그간 살아온 삶이 다 헛되고 저주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위안을 준다.




구석기 시베리아 지역의 작은 여성, 야난.

원시적이고 무지한 그 여성이 2만 년을 훌쩍 뛰어넘은 가장 문명적이고 세련된 현대 여성에게 무슨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처음엔 그저 제목에 이끌렸다가, 잠시 심하게 휙 뛰어넘은 시대와 배경이 주는 낯선 즐거움에 흥미를 느끼다가, 내 딸 또래의 주인공을 향해 안쓰러운 시선으로 따라갔다. 그러다 점점 자연의 법칙과 질서에 순응하며 모든 생명을 경외하는 모습, 그 가운데에서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혈육을 보살피고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 자기 혈통을 지키는 모습을 보며 야난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이 어리고 연약한, 부모까지 다 잃고 오갈 데 없는 여자 아이가 자연의 무자비한 위협과 부족 간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을 버리거나 잃지 않고 인간다운 품위와 도덕심을 지켜나가려고 노력하는구나. 비록 한 번의 실수가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스스로 경멸하고 죗값을 치르며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우리는 어떠한지.

인권이니 뭐니 해도 여전히 여성을 성 상품화하는 시대, 인간으로서의 도덕성이나 품위보다 돈이 우선인 문화, 여성이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종종 스스로도 외모의 노예가 되는 가치관, 아직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도구화된 여성의 지위들, 너무 아프고 힘들지만 군소리 없이 버텨온 수 만년의 엄마들과 지금도 그렇게 찌그러져있기를 강요당하는 엄마들, 그런 엄마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출산과 육아로 경력 단절을 기꺼이 감내하며 뒤로 물러나는 이 시대의 딸들, 이 모든 것들이 그때의 시베리아 한 구석과 뭐 얼마나 달라진 게 있는지. 혹 더 나은 게 있는지. 오히려 성가치관은 더욱 문란해지고 인간에 대한 서로의 혐오가 공공연해진 험악한 심성들, 인간이 인간다움을 회복한다는 것이 단순히 샤머니즘적인 피 흘림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초과학과 지성들, 그 사이에 한 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맹목적으로 맞서 싸우고 싶어지거나 모든 걸 내려놓고 끌려다니고 있지 않은지.



야난의 성장이 그래서 부럽다.

한 걸음이라도 더 용감해지려고, 한 순간이라도 더 삶에 집중해보려고, 한 번이라도 더 고민해보려고, 마음속 어머니와 시어머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어깨를 펴고 또 자신에게 솔직한 목소리를 내는 그녀의 그녀 자신됨, 그녀의 자신감, 그녀의 딸다움, 그녀의 아내다움, 그녀의 며느리다움, 그녀의 언니다움, 그녀의 그 모든 그 '다움'들이 그녀가 끝까지 아기를 지켜내기 위해 자존심을 놓고 남편에게 돌아가게 했고, 자신의 죄를 정리하게 했고, 관습과 어른들의 지혜에 순종하게 했고,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서로를 배려하고 타협하며 윈윈 하게 했고,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강력한 사냥꾼인 스위프트의 청혼을 받게 했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세상의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게 했다.




"야난, 너도 언젠가는 자라서 한 사람의 어머니가 되겠지. 남자가 고기를 지배하고 오두막을 지배해서 여자보다 월등히 위대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남자가 위대하다면, 여자는 거룩하단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딸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란다."
나는 어머니의 이 말을 불의 강으로 떠나기 전에 상기했어야 했다.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이야말로 여자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임을 알아야 했고, 남자들의 독단을 욕하기 전에 여자의 삶이라 해서 결코 비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옳았다. (<세상의 모든 딸들> 2권, p.331)



어머니의 소중한 가르침이 그녀를 돌이키게 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다시 한번 돌이키게 한다. 나는 얼마나 그럴듯한 이름들을 원했던가. 얼마나 남자들과 경쟁하고자 했으며 남성이 만든 부조리한 세상을 규탄하고자 했던가. 오직 '어머니'라는 이름표만 달고 있는 여자들을 향해 재능도 없고 자의식도 부족한 것 아니냐고 얼마나 비난하고 싶었던가. 나 자신이 엄마가 되어 누가 봐도 비루한 일상을 보낼 때 얼마나 박차고 나가고 싶었던가. 내가 밖으로 나돌 때 엄마의 부재를 우리 아이들은 또 얼마나 몸서리치며 두려움과 그리움에 떨었던가. 나는 여성이기 전에 누구이며, 어머니이기 전에 누구여야 하는가. 어머니로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나는 얼마나 거룩하고 강인한가.



틸은 내 몸에 여신 오헌의 징표를 새겨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핏줄 여자들의 강인함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이란다. 그러나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강인하지도 못하고, 거룩하지도 못하다. 나는 지금 다만 비참할 뿐이다.
단 한 번의 떳떳하지 못한 관계로 근본을 의심받는 아기를 갖게 되었고, 지금 그 아기가 태어나려는 순간이다. 아버지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태어나는 이 아이의 삶은 어떻게 될까? 나 혼자의 힘으로 이 아이의 보호막이 되어 주기엔 나는 강하지도, 거룩하지도 못하고 다만 비참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불의 강이나 여자 호수로 가든, 아니면 스위프트를 따라 털의 강으로 가든, 나는 물러서지 않고 버틸 것이다. 강인하지도 거룩하지도 못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샐리의 핏줄이니까. (<세상의 모든 딸들> 2권, p.332)





찢어지는 듯한 고통 중에도 나도 그렇게 내 삶을 성찰해본다.

아이가 아프다. 나도 마음이 아프다. 요즘 나는 조금 많이 삶의 터전을 잃었고, 또 조금은 새로운 터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 내 잘못이 분명히 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나를 넘어뜨릴 때가 우리 인생에 종종 있다. 하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고 버틸 것이다. 강인하지도 거룩하지도 못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그분의 핏줄이니까. 그리고 나는 어머니이니까.



1,2권으로 나온 출간 3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이란다. 의외로 빨리 읽히는 몰입감 짱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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