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_구습의 폭력에서 자아를 찾다

자기를 구원한 슈퍼우먼, 나혜석의 <경희>를 읽고

by 차가운 열정


한 여자가 있다.

그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잠시 귀국해서도 부모님 품에서 마냥 쉬지 않고 집안을 돌본다. 집안일을 거든다는 게 그냥 조금 시늉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더 주도적이고 효율적으로 척척 해낸다. 많이 배웠다고 어깨를 들썩이거나 눈을 아래로 내려깔지 않는다. 집안일 도우미에게도 친절하고 주변 친지들에게도 예의바르다. 남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혜롭게 상대하고 아직 남은 공부에 미련이 있어 학업에 정진하고자 개학을 기다린다.



나혜석의 <경희> 속 주인공, '경희'.

인품도 지식도 포부도 다 갖춘 재능있는 20세기 신여성. 경희의 장점은 단지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면서도 전통을 배척하려고만 한다거나 구습에 젖어 신문물을 비난하는 양 극단의 균형점을 잘 찾아갔다. 조선이 이런 여성을 놓친다는 건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1910년대의 조선은 그냥 조선이었다. 경희는 자기 삶을 아버지가 정해놓은 대로 살아야만 했다. 잘 배워서 시대를 계몽하고 싶었으나 여성에게 배움은 이미 족하고 넘쳤고 계몽은커녕 자기 하나도 온전히 나 자신으로 버티기 버겁다. 딸은 가르쳐서 뭐 하느냐고 주변 사람들은 배우는 여자를 손가락질한다. 분명 가르쳐 보니 집안일 부지런한 것이며, 일자리를 얻어도 연봉이 다른 것이며,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 씀씀이나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물리치는 지혜나, 뭐 하나 나무랄 것없이 좋아서, 응, 가르칠만 하구나 하면서도. 더 배워서 뭐 하냐, 그저 덜 좋은 데에 헐값에 팔리기 전에 어떻게든 여자는 시집가는 것이 최고라고. 이름 석자 선명한 아버지 이철원이나, 당시 이름도 없던 어머니 김 부인은 아주 당연한 부모의 도리라는 듯 경희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 약속을 잡아버렸다.




경희는 더 배우고 싶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도 관현악 연주 소리를 듣는 것 같고, 빨래하면 땟국물 흐르는 것도 재미있게 보였다. 자기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자기는 밥이 아까울 정도로 사람답지 못하게 느껴졌다. 하나라도 더 움직이고 더 일하는 건 다 경험으로 녹여 배워 자기만의 지식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니 욕심껏 움직이고 싶다. 배울 줄을 몰라서 우둔하게 시어머니를 괴롭히는 답답한 수남이네 아내같이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한다. 남들은 '여학생'이라고 하면 집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밖으로 돈이나 쓰러 다니고 기본 도리도 할 줄 모르는 바람 든 처녀애라고 여겼지만, 경희는 잘 배운 '여학생'의 본때를 보여준다. 잘 배워서 여성도 배우면 지혜로워지고 사회를 발전시켜나갈 힘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방문 밖에 시부모님 되실 분들이 와 있다.

곧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한다. 얼굴도 모르는 김 판사댁, 대갓집 며느리로 부귀영화를 누리겠지. 경희도 안다. 부모님 뜻이 무엇인지. 조선에서 여자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서로 속 편하고 사지 편한 일인지. '여자란 온량유순해야만 한다는 것', '여자의 생명은 삼종지도라는 것'도 알고, '일어서려면 압박하는 주위요, 움직이면 사방에서 들어오는 욕' 가운데 살고 있다는 현실 인식도 분명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엄한 명령 앞에 맞선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도 잘 안다.



"아버지, 안자의 말씀에도 일단사 일표음(一簞食一瓢飮)에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도시락에 담긴 밥과 표주박 물에도 그 가운데에 즐거움이 있지 않겠는가?)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먹고만 살다 죽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금수이지요. 보리밥이라도 제 노력으로 제 밥을 제가 먹는 것이 사람인 줄 압니다. 조상이 벌어놓으 밥, 그것을 그대로 받은 남편의 그 밥을 또 그대로 얻어먹고 있는 것은 우리 집 개나 일반이지요." 하였다. -중략-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이철원, 김 부인이 딸보다 먼저 하나님의 딸이다 여하튼 두말 할 것 없이 사람의 형상이다. 그 형상은 잠깐 들씌운 가죽뿐 아니라 내장의 구조도 확실히 금수가 아니라 사람이다.




자아를 깨달은 사람은 실존의 의미를 회복한다.

그래서 경희 표현대로 '키가 별안간 엿 늘어지듯 부쩍 늘어진 것 같'고, '눈은 모든 얼굴을 가리우는 것 같'이 '황홀하다'. 문밖의 '빤빤한 햇빛이 스르르 누그러지는 것 같'고, '남풍이 곱게 살살 불어 들어온다'. 곧 '여름 소나기가 쏟아질' 것을 예감한다. 한 인간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기 삶을 아버지, 남편, 아들에게 차례로 의탁해야 하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여 무식을 인고와 복종의 방편으로 삼아야 하는 구습의 폭력. 작은 몸, 작은 영혼으로 "아이쿠, 어찌하면 좋은가!"를 반복하며 방에 갇혀 발을 동동 구르는 어린 여인의 몸부림이 가냘프지만 강인하게 느껴진다. 인생을, 자아를, 삶의 의미를 독립적으로 찾고 세워 나가고 싶은 열망이 되바라지고 괜히 성정을 그르치며 인생을 망치는 것 같이 비난받을 일인지. 뭐, 경희가 떡 하니 독립 투사가 된 것도 아니고, 시대를 휘젓는 명사가 된 것도 아니지만, 그냥 작은 주먹을 쥐고 읊조리는 작은 탄식의 기도만으로도 자기 인생과 시대를 마음껏 짊어지고 가장 강력한 시대적 바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맞고 견디는 선구자의 길에 서 있다. 그 떨림, 그 두려움, 그 설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오늘의 우리가 여기에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꿈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반에 예쁜 여자애 셋이 있었는데, 서로 입이라도 맞춘 것 같이 셋 다 꿈이 '현모양처'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그 때 처음 들었다. 그래서 그게 대단한 직업이나 위대한 여성 지도자 쯤 되는 줄 알았다. 집에 가서 사전을 찾아보니 그냥 쉽게 말하면 '평범한 가정 주부'인 것 같아서 실망했다. 하지만 그렇게 예쁜 여자애들은 누군가의 좋은 아내가 되어 아이 낳고 사는 것이 왠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배운 것이 다 편견이고 숨쉬는 문화가 다 편견이었기에. 지금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보니 현모양처는 비록 직업은 아니지만 참 중요한 모델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그 무엇도 되어선 안 되고 오직 그 길만을 강요하는 세상은 다른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의 성공은 남편 잘 만나서 잘먹고 잘사는 것, 아이들 잘 키워서 대학 잘 보내고 취업 잘 시키는 것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내 부모님도 그랬다. 여대에 가면 시집 잘 간다고. 근거없는 풍문이 사실처럼 들리던 시절도 있었다. 결혼을 잘 하기 위해 영문학이나 법학보다 가정학과가 더 인기가 높은 시절도 있었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남편의 사회적 지위나 정신적인 상태가 여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안타까운 시절도 있었다.




무려 100년 전에, 인형이 되길 거부한 여성 '나혜석'.

딸이 10세가 될 때까지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던, 그리고 축첩으로 어머니의 가슴을 멍들게 했던 꼰대 아버지. 그나마 아들 딸 차별없이 신교육을 받도록 할 만큼 그나마 깨어있는 축에 속했다. 그러나 여대생의 90%가 재봉과 자수를 전공으로 선택하던 시절, 독야청청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혜석은 자기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여자를 첩으로 들였다는 아버지의 소식에 그만 폭발하고 만다.



남자는 부(夫)요, 부(父)라, 양부현부(良夫賢父)의 교육법은 아직도 덛지 못하였으니, 다만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 된 교육주의라. 정신수양상으로 언하더라도 실로 재미없는 말이라.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 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나혜석,[이상적 부인],<학지광 제3호 1914.12> 중에서.



당시 일본은 '신여성운동'의 여파로 여성의 각성과 해방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나혜석은 조선에서 여성차별과 억압을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새로운 사상에 매료되었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1917년에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같은 해 7월에는 기관지 <여자계>를 창간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여자계> 2호에 국내 첫 페미니즘 문학으로 기록되는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경희의 고뇌가 지금 보기엔 한낱 개인적이고 어설퍼 보여도 엄연히 프로메테우스의 고뇌이다.

나혜석은 그렇게 여성에게 불을 던졌다. 이후 파리에서 새로운 문화와 자유로운 예술을 접하고 돌아온 혜석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실험결혼론을 소개하며 "이혼의 비극은 여성해방으로 예방해야 하고 실험결혼이 필요하다."라는 파격적인 칼럼을 <삼천리>에 기고했다. 가정폭력에 대해 맹비난을 퍼붓고 남편의 폭력을 참지 말고 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사회적으로 맹비난을 받았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이어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이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나혜석, 이혼고백서, 삼천리 제6권 제8호 (1943.8.)>




나혜석은 '경희'와 같이 각성과 실천으로 점차 변모하는 순수한 여성이 더 이상 아니다.

각성과 실천 이후, 개인적으로는 자유연애를 넘어 불륜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비참한 인생을 마쳤다. 비록 과격하긴 했지만 지치지 않고 조선의 구습에 맞섰다. 조금 더 다듬어진 일생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예술과 문학, 그리고 사상 측면에서 100년을 앞선 목소리를 남겼다.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의 착한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착한 아내인 인형으로

그네들의 노리개였네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주고

높은 장벽을 열고 깊은 규문을 열고

자유의 대기 중에 노라르 ㄹ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 되기 정네

아버지의 달이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


나는 사람이로세.


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천부의 힘은 넘치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 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새날의 광명이 비쳤네.



- <나혜석 작사, 김영환 작곡, 인형의 가(家), 매일신보(1921.4.)>



나혜석 관련해서 더 파느라 본 책들, 혜석은 인형이길 거부했으나 어쩌면 꽃이길 거부하지는 못한 것 같은 안타까움이 든다.



제목 이미지:나혜석,<스페인의 항구>,네이버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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