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일본 경찰 이정출, 시대의 격랑에 휘말린 개인의 고뇌
매 작품 자신의 최고 연기를 경신하는 배우가 있다. 모든 것을 끌어올려 펼쳐냈으니 더 꺼낼 카드가 없을 것만 같은데, 매번 그 의심을 보기 좋게 배반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대체 뭘 또 보여준단 말인가' 싶다가도, 새 영화를 보고 나면 뒤통수를 후려 맞은듯한 충격을 얻는다. 우리 시대의 연기자, 천재성과 노력의 가장 이상적 배합이 만들어낸 배우 송강호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몇 년 간 송강호의 필모그라피는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내적, 외적 결실을 맺어냈다. '설국열차'(2013), '관상'(2013), '변호인'(2013), '사도'(2015)까지, 명불허전으로 통하는 연기력을 입증한 것은 물론 관객들의 지지까지 이끌어내며 충무로를 대표하는 배우로 군림해왔다.
'사도' 이후 약 1년 만에 다시 선보인 그의 신작은 김지운 감독의 '밀정'(감독 김지운, 제작 영화사 그림㈜,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이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이어 김 감독과는 벌써 네 번째 만남이다.
'밀정'은 1920년대 말,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일본 경찰 사이의 숨 막히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을 그린 작품이다. 송강호는 영화의 타이틀롤과도 같은 조선인 일본 경찰 이정출 역을 맡았다. 이정출은 시대의 격랑에 휘말려 줄곧 운명의 갈림길에 서야 했던 캐릭터. 역사 속 실존 인물인 황옥을 모티프로 삼은 인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역관이었다 일본 경찰 조직의 요직을 차지하게 된 이정출은 과거의 절친했던 동지들을 소탕해야 하는 순간을 겪기도, 과거의 이력에 바탕해 의열단을 대상으로 한 첩보 활동을 명령받기도 한다. 의열단의 핵심 요원인 김우진(공유 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친분을 쌓으려 하던 그는 조선인 일본 경찰의 애환을 은연중에 드러내거나 요원들의 편의를 봐주기도 하면서 우진의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우진은 일찍이 정출의 의도를 파악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검은 속내를 알면서도 각자의 임무를 위해 상대를 이용하려는 신경전을 펼친다. 이들의 관계, 확장해서는 의열단과 일본 경찰 조직의 관계에서 '과연 누가 밀정인가'에 대한 물음은 크게 중요치 않다. 이정출이 거듭하는 '변심을 위장한 변심'은 결국 시대적 상황에 기반한 개인의 고군분투다. 그가 밀정이든 아니든, 또 어떤 밀정이 조직을 오가든, 이정출은 그 자신이 처한 우연적 상황들에서 때로 자신을, 때로 조국을 위한 선택을 이어간다.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시대, 궁지에 몰린 개인이 벌이는 치열한 갈등의 내부에는 입신과 안전, 그리고 일말의 민족적 사명과 양심이라는 대척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정출의 갈등은 '밀정'의 서사를 구불구불 순환하며 관객의 눈을 붙잡는다. 임무를 위한 계략과 신경전이 전부가 아니다. 이정출이 이끄는 '밀정'의 정서는 때로 시대의 결단을 앞서는 개인의 갈등이 지배한다. 영화 속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 분)의 중요한 대사에서도 언급되듯, 결국 '밀정'은 두 가지 길의 기로에 놓인 한 개인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영화에 대한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정출을 연기해낸 배우가 그 누구도 아닌 송강호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그려낸 정출은 잔악하고 이기적인 첩자로만 규정되기 어려운 캐릭터다. 때론 속내를 알 수 없는 구렁이 같고, 때로는 위장을 뛰어넘은 인간미를 읽게 만든다. 송강호가 아닌 그 어떤 배우가 이 배역을 이토록 가슴 울렁이게 완성할 수 있었을지, 상상조차 어렵다.
'설국열차' 속 꼬리칸의 남자, '변호인' 속 성장을 거듭하는 인권 변호사, '사도'의 영조 등, 송강호는 무르익은 연기력의 최대치를 자주 경신해왔다. '밀정'의 정서를 능수능란하게 갖고 노는 그의 능력에 관객들은 또 한 번 혀를 내두를 법하다.
(권혜림, 조이뉴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