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라 생각될 수 있으나, 간혹 20년 전 와인을 처음 마신 때를 반추해 본다. 그리고 당시 와인을 같이 마시던 이들과 가끔 만나서 이야기 하다 보면, 정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가 술술 나와서 좋은 안줏거리가 된다. 차분히 생각하니 변한 것도 많고 변하지 않은 것도 많다. 매일 시장에 대해 무거운 숫자만 이야기 하다가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통계 수치를 찾아서 숫자를 제시할 수도 있으나, 올해 4월에 쓴 칼럼에서 20년 전 시장에 대한 통계를 분석했으니 이 글에서 구체적인 수치는 제시하지 않는다.
2008년인가 2009년인가 처음 오베르(Aubert, 당시엔 '어버트'라 불렀다)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아는 수입사 대표가 소량 생산되는 로버트 파커 98점 와인이라고 소개했는데, 화이트 와인을 8시간 저온에서 디캔팅한 뒤 마셨고 그 다음날 마셨을 때도 엄청난 힘을 보여주었다. 놀라워서 와인에 대한 찬사를 보냈는데 당시 살 수 있는 가격은 10만원 아래였다. 지금 오베르의 가격은 그 몇 갑절이다. 그보다 더한 것은 로마네 꽁띠(Romanee Conti) 등 특급 와인들의 가격이다. 당시 로마네 꽁띠의 가격이 360만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어떤 애호가는 돈이 생기는 대로 로마네 꽁띠나 보르도 특급 와인을 셀러에 모아두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지금 가격은 어떠한가?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와인 10병 중 7~8병이 레드 와인이었다. 특히 와인 초심자가 선호하는 와인은 레드 와인이 압도적이었다. 지금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화이트 와인 소비가 높아지는 추세다. 뉴질랜드 화이트 와인이 시장에서 각광받는 것 역시 이러한 추세를 잘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더 강화될 것이다. 2025년 시장 보고서에서도 화이트 와인의 추세를 정밀하게 분석할 예정이다. 나도 화이트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매우 반갑다.
지난주 와인숍에 가서 보졸레 와인을 하나 샀다. 누보는 아니었지만, 갑자기 11월은 보졸레 누보의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보졸레 누보는 와인 시장에서 큰 연례 행사였다. 성대한 파티를 열었고 보졸레 누보의 수입 물량도 상당했다. 그러나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보졸레 누보의 위상은 많이 떨어졌다. 지금은 보졸레 누보 파티를 연다고 해도 과연 어느 정도로 사람들이 모일지 모르겠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보졸레 누보가 아닌, 보졸레 와인들에 대한 상당한 애정이 있다. 특히 부르고뉴 와인 가격이 많이 오르면서 보졸레는 그 대체 지역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이야기냐 하겠지만 과거 샴페인 평균 가격의 시작점은 6~7만원이었다. 그 이하는 절대로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일하는 품목을 중심으로 찾는다면 5만원 중반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원인은 물량 증가에 있다. 과거에는 시장에서 샴페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해도 될 수준이었고 일부 열정적 소비자들만 찾는 특별한 와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화가 많이 이뤄졌고, 금액 비중으로는 시장의 흐름을 바꿀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늘어난 물량만큼 시장 가격은 상대적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고급 주류임에는 틀림 없으나 과거에 비해 샴페인의 접근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내 기억에 20년 전 칠레 몬테스 알파(Montes Alpha)의 가격은 3만원 후반~4만원 초반대였다. 그런데 지금 가격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그 당시에는 얼마나 남겼던 것인가?” 그런데 이런 부분에서 수입사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간 물량이 많이 늘었고, 생산자와 수입사 사이의 오랜 신뢰 관계로 인해 수입 단가에 대한 전체적인 합의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다. 장기간 거래는 가격을 안정화할 수 있고, 수입사 역시 유통 물량이 늘어나면 단가를 올리지 않더라도 수익을 보전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 결과로 인해 중급 카베르네 소비뇽 등 칠레 주력 와인의 가격이 크게 오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칠레 와인의 가격이 반갑기는 하다. 덕분에 나는 요즘도 즐겁게 칠레 와인을 사서 마시고 있다. 이 가격에 이 품질이라니!
고급 와인에 대한 소비자의 선호는 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부르고뉴 와인이나 일부 샴페인의 경우 가격이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가격이 오르는 것은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된 와인의 경우 그 가격이 희소성으로 인해 더더욱 오르고 있다. 마치 주식 투자 같다. 어느 자리든 멋진 보르도 1등급 와인 한 병을 갖고 나간다면 당신은 그날의 스타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다. 편안함과 고급스러운 것, 맛있는 것, 멋있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이 추세는 계속되지 않을까?
콜키지로 대표되는 와인 반입료는 와인 애호가라면 늘 고민하는 부분이다. 식음료 업장의 경우에는 매출의 일정 부분을 주류로 채워야 하는데, 반입을 하면 그 매출 부분이 사라진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내가 원하는 와인이 없는 경우가 많아 원하지 않는 와인을 주문해야 하거나,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주류 반입료가 생기게 되었는데 음식 가격에 주류 반입을 가정하고 가격을 책정한 뒤 반입료를 무료로 하는 식당도 많이 생겼다. 이 경우에는 주류 반입을 하지 않는 고객이 상대적으로 비싼 음식을 사 먹게 되는 것이니 언제나 공정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아마도 이 문제는 앞으로도 합리적인 답안이 나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 와인 직구 관련 탈세에 대한 기사가 언론에 크게 난 적이 있다. 국내 주류 관련 세금 등이 과도한데 고가 주류는 그 비율이 더욱 커진다. 덕분에 고급 와인을 마시려는 사람은 외국에 가서 구입해 오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여러 가지 편법이 작동된다. 누구나 좋은 와인을 싸게 사고 싶고, 돌아와서는 주변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탈세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변칙적으로 들여온 와인을 몰래 팔면 망신을 당하기 십상이다. 부끄럽지 않은가? 겉으로는 점잖음과 도도함을 보이려 해도 내면에 이런 옹졸한 면모가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세금을 제대로 내고 떳떳하게 마시자.
여러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와인 품질의 상향 평준화다. 가격 대비 뛰어난 와인들도 많이 늘었다. 와인은 자연의 선물이라고는 하나, 기술이 와인 품질에 주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과거보다 더 맛있는 와인을 더 저렴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기분 좋은 변화는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