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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May 20. 2015

'거대한 그녀'의 세계를 번역하다

유치하고 찌질해도 괜찮고 싶은 삶을 위하여

<미란다처럼>이라는 책 제목을 들으면 어떤 이들은 쭉쭉빵빵한 몸매의 모델 미란다 커를 떠올리며 그녀처럼 예뻐지는 법을 담은 책이라고 짐작할지도 모른다. 2년 전 미란다의 책을 번역하려던 때만 해도 포탈 사이트에 ‘미란다’를 치면 온통 미란다 커의 사진뿐이었으니까내가 얘기하려는 미란다도 ‘쭉쭉빵빵’하긴 하다.

훠어얼씬 더.

 

 185cm, 나이 42세, 종종 아저씨로 오해 받는 싱글 여성

 

  커서도 길바닥을 말달리기로 뜀박질을 하는 미란다는 21세기 차가운 도시 사람들이 반길 만한 스펙을 지니지 않았건만 못 말릴 정도로 찌질한 웃음 코드로 나를 사로잡았다. 미란다 하트(Miranda Hart)의 매력에 빠져 출판사까지 차린 덕후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https://youtu.be/pmKtC8_4_wM

출근길을 신나게 만드는 미란다의 말달리기(galloping). 미란다가 싸이의 말춤 유행을 예언했다는 설도 있다.

부제목을 눈치 보지 말고 말달리기’로 정한 이유는, 저 문장이 그 동안 심하게 눈치 보는 인생을 살아오던 나에게 미란다가 준 자유의 주문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내장된 눈치는 나이를 먹을 수록 발달하여 상대방의 분위기를 읽고 ‘틱’소리만 나도 ‘탁’하고 반응하는 식스센스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어느 정도의 눈치는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었지만 어딜 가나 사람들 눈치를 보며 자신의 겉모습과 행동을 재단하는 것이 습관이 되자 진짜 내 모습과 생각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회사에 갈 때는 '어느 정도' 화장을 해야 하고 격식을 차릴 때는 '어느 정도' 차려입어야 하고 여름에는 털 정리를 '어느 정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려면 '어느 정도' 집을 구해야 하고 번역을 하려면 '어느 정도' 실력이 돼야 한다. ‘어느 정도’라는 명확하지도 않은 남의 기준에 휩쓸려 떠나 보낸 시간이 아까워질 무렵 영국 시트콤 <미란다>를 만났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긴장한 나머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은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사회 규칙 앞에서 우당탕탕 엎어지거나 훌러덩 옷을 벗으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미란다를 보면서 '와, 엄청 유치해...'라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바탕 웃고 난 후, 내 마음은 ‘나도 어른인 척하기가 너무 힘들어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분명 어릴 때는 준비하지 못했던 어른의 세계이건만 다른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걸까? 물론 눈치껏 남들처럼 똑같이 행동하면 주목 받지 않고 살아갈 순 있겠지만 쪽팔림을 한껏 드러내며 웃음을 자아내는 미란다의 삶이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시트콤 <미란다>1화에서 미란다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골라 옷을 평가하는 리얼리티 쇼를 패러디 한다. TV에서 하는 리얼리티 쇼들은 "그 옷은 너무 안 예뻐요.” “그건 절대 입지 마세요.” “그 신발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등등 다른 사람의 겉모습을 평가하곤 한다. 하지만 역시 미란다는 다르다.


"저기, 잠시만요. 그쪽 옷차림을 살펴봐도 될까요? 음... 저라면 그 티셔츠는 안 입겠어요. 근데 그 티셔츠 엄청 편해 보이긴 하네요. 실제로도 편한가요?"

"네."

"지금 옷차림 좋아하세요?"

"네."

"남들이 싫어할까 봐 신경 쓰이세요?"

"아뇨."

"좋아요. 그럼 계속 그렇게 입으세요. 안녕~"

아무리 <미란다>를 여러 번봐도 미란다의 책을 번역한 후에도, 여전히 내 안에는 ‘꼬장꼬장한 선비를 자처하는 나'와 '자유를 갈망하는 나'가 치고 박고 싸우며 접전을 벌이고 있다. 나는 지금 막 눈치를 덜 보고 사는 삶을 향해 방향을 설정했을 뿐이다. 아무리 눈치를 안 본다 해도 정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다. 하여 나와 같이 멋대로 살고 싶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기 위해 이 글을 시작한다. 이 세상에는 아직 '미란다'가 많이 필요하니까.


민트리

혼자 책을 계약하고 번역하고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만들고 팔며 내게 주어진 2015년의 시간을 채우고 있다. 

<미란다처럼>을 만들기 전에는 평범한 IT 전문서 편집자로 일했다. 회사를 갔다가 집에 오면 미드나 영드를 몰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나도 하면 잘 할텐데...'라는, 요즘 엄마들도 잘 안 한다는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식의 정신 승리를 해왔다. 막상 글이고 번역이고 시작하고 보니 금세 밑바닥이 드러나서 전전긍긍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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