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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Jun 21. 2015

덕후 출판의 시작

좋아서, 해보고 싶어서, 더 알고 싶어서

오타쿠, 오덕후, 십덕후...


어감도 안 좋고 듣자 마자 기피하고 싶은 명칭들이다. 아니, 명칭들'이었'다, 라고 해야 할까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덕후였어?"라고 질문을 하면 "아, 좋아하기는 하는데 덕후까지는 아니고."라는 변명을 하며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곤 했다. '덕후'라는 말이 특정 분야(일본 애니메이션)에 메여 있었던 탓도 있지만 덕후 감성을 공유하면서도 덕후란 뭔가 더 깊은 내공(?)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베개를 애인 삼아 잠을 청하는 화성인 정도?)


지금처럼 덕후라는 말이 활성화된 마당에는 "좋아하기는 하는데 덕후까지는 아니고."라는 말로 덕후라는 명칭을 기피할 필요가 없어졌다. 역사 덕후, 떡볶이 덕후, 게임 덕후, 드론 덕후... 온갖 것에 덕후라는 말이 붙여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요즘처럼 온갖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던 때는 없었다. 그야말로 매일매일 새로운 사진, 그림, 이미지, 만화, 웹툰, 글, 영화, 드라마, 노래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이 쓰잘데기 없이 나불대는 글조차도 SNS를 통해 누군가에게 전달되어 소비될 하나의 콘텐츠니까. 당연히 그 많은 콘텐츠 중에 내 심장을 정확히 저격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방바닥에 엎드려 <미란다>의 괴상한 행동에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만 해도 내가 저 사람이 쓴 책을 번역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이 타이밍에 좌지우지되듯이 내가 미란다의 책을 만들게 된 것도 '그때'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란다의 책을 인질 삼아 출판이라는 도피처를 찾았던 그때.

덕후의 조건

어쨌든 좋아한다는 이유로, 어찌 보면 미란다 책의 한국어판 판권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그렇게 무모한 출판이 시작되었다. 드라마 덕후, 출판 덕후가 벌인 일이니 이런 걸 덕후 출판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직업에 대한 조언 중 가장 흔한 것으로 '좋아하는 건 취미로 하라'라는 말이 있다. 어릴 때는 썩 합리적으로 들리는 조언이었는데 점점 생각이 달라진다. 열심히 일해서 집도 사고 편안한 노후를 그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열심히 일할 수록 회의감만 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책 제작을 상담하기 위해 만났던 인쇄소 이사님의 말씀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편집 일 꼴랑 3년 하고 무슨 출판사를 차리냐고 잔소리를 하지 않으실까 하고 만났던 이사님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가 젊을 때는 당장 먹고 사는 게 시급한 시대였지만 지금은 젊은이가 삶의 질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대야. 굶어 죽지는 않잖아. 그러니까 고민하지 않고 사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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