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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Jul 11. 2015

책 한 권 내고 망하기 1

시작은 덕키하였으나 끝은...?

내가 망하려고 출판을 시작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나?


누군가 왜 책을 만들었냐고 물어오면 말문이 턱 막힌다. 머릿속에 수많은 이유와 그럴 듯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동시에 와르르 쏟아져 나뒹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아주 무난한 답을 알고 있고 그 대답을 가장 자주 사용한다. 


"좋아하던 영국 시트콤의 배우이자 각본가인 미란다라는 사람이 쓴 책을 번역하고 싶어서"


출퇴근하기가 너무 싫어졌다거나 예전부터 번역을 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시켜주지 않았다거나 마침 책의 판권이 살아있었고 에이전시가 판권을 사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계약을 했다거나 이 영국 여자가 얼마나 골 때리게 웃기면서도 대단한 사람인지 등등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풀어놓진 않는다. (물론 상대방이 관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어오면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기도 한다. 너무 풀려서 침 튀기며 자아도취의 상태로 빠질 때가 있다는 게 흠.)


구구절절한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고작) 3년차 편집자가 (굳이) 없는 돈을 주고 국내에서 인지도가 높지도 않는 (그것도 요즘 안 팔린다는) 책의 판권을 사서 1년 반 동안 외주 편집일을 해 먹고 살면서 번역해서 디자인해서 출판하고 매달 창고비를 내가면서 사는 것을 택한 일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출퇴근이 힘들었으면 차라리 그 돈으로 여행을 갔다 왔어야지, 번역을 하고 싶었으면 출판사 문을 두드렸어야지, 시트콤이 좋았으면 그냥 영드 커뮤니티에서 덕질이나 하며 놀았어야지.


그렇다고 책 한 권으로 돈 좀 벌어볼까 하고 시작한 것도 아니다. 출판을 한다는 것은 사업을 한다는 것이고 책 한 권으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의미 있는 매출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나는 망하려고 출판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지. 



원서 판권을 계약하던 당시 그렸던 만화


어떻게 하면 잘 망할 수 있을까? 


책을 덜컥 계약한 순간부터 겁이 많은 나는, 최소한의 리스크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폭상 망하더라도 언제 출판이란 걸 했냐는 듯 조용히 도망쳐야지. 


망하기 위한 대장정! 그렇게 덕후 출판 실험이 시작되었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오히려 글이 안 써지는 단계에 있습니다. 구독자가 한 명, 한 명 늘어날 때마다 흠칫 흠칫 놀랍니다. (아니, 대체 뭘 보고?) 부담감이 적립되고 있지만 그래도 계속 고민하며 글을 쓰려고 합니다. '내가 뭘 구독했었나...?' 할 때쯤 글이 올라올테니 배송이 엄청 오래 걸리는 해외 구매대행을 시켰다 생각하시고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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