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덕키했으나 끝은...?
여러분이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정말로 잘해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해킹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뭔가 자기 자신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해커와 화가』라는 책을 쓴 프로그래머, 폴 그레이엄의 말이다. 갑자기 왠 해킹인가 싶겠지만 어떤 분야든 통찰력을 빛낼 정도로 내공이 쌓인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다른 분야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을 때가 많다.
'뭔가 자기 자신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
살던 대로 계속 살다 간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같은 상황이 오진 않을까 두려워진다. 게다가 요즘 같이 이러나 저러나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궁지에 몰린 쥐는 이판사판이 되는 법. (그러고 보면 이렇게 불안감을 조성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보내야 하려나. 겁 많은 나의 등짝을 밀어주었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환경과 교육 내용에 따라 세계관을 형성한다. 어릴 때부터 받아오던 어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행복하게 사는 길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또 다른 세계관이 생기면서 소위 '안정적인 삶'과 '불안정한 삶'의 위치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두 가지 모두 나름의 일리가 있는 세계관이었지, 무조건 한쪽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일반적인' 세계관(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세계관 그리고 어쩔 때는 나도 옳다고 생각하는 세계관)
: 학자금 대출 다 갚았으면 IT 전문서 편집자로서 경력을 쌓으면서 저축하고 보험도 들고 연금도 들고 노후 준비하고 엄마 선물도 사드리기. 그리고 서른 살 즈음에 결혼도하고 대출받아서 집도 마련하고 대출금 갚으면서 아이도 낳아서 키우고 가끔 짧게 여행 다녀오고 남들 하는 만큼 갖추고 살기.
2. '다른' 세계관(내가 믿고 싶은 세계관, 자꾸만 되뇌는 세계관)
: 맨날 '작가가 되고 싶다, 번역하고 싶다, 내 손으로 재밌는 걸 해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지 않고 죽기 전에 진짜 해보면서 살기. 조금 덜 먹고 덜 쓰고 살더라도 출판하는 사람으로 살아보기.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기.
어렸을 때는 '일반적인' 세계관에 더 가까웠던 기억이 난다. 큰 회사, 좋은 회사에서 나라는 인재를 알아봐 주기를 그리고 간택해 주기를, 그리고 투자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작 나는 내 잠재력에 투자를 했던 적이 있던가? 그저 알바해서 학자금 갚기 급급했던 것을 빼면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렴 하고 내 돈을 자신에게 투자해본 적이 있었나? 되돌아보면,『미란다처럼』의 번역 판권 선불금 250만 원은 어쩌면 나의 잠재력에 투자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투자금이었던 것 같다.
결국 나에게 중요한 것은 망하고 말고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첫 번째 세계관에 따르면 사업을 할 때 지속적인 성장을 해야 하고 팔리는 책을 만들어야 하고 성공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망한 것이 맞다. 하지만 두 번째 세계관에 따르면 내 방식대로 출판 실험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 나는 목표를 이룬 것이 맞다.
사람들은 각자 다 다른 세계관을 지니고 살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명제가 하나 있다. 삶은 원래 다 그지 같다. 그리고 인간은 다 죽는다.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삶은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나마 덜 그지 같게 살기 위해 미란다 같이 웃기는 여자들을 찾아내고 내게 재밌게 느껴지는 일을 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다.
출판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 또 한 가지 마음 먹은 것이 있다. 내 식대로 하자는 것. 물론 출판의 기본적인 틀 위에서 출판 행위를 하겠지만 기존의 방식을 따라가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것들을 다르게 했는지는 앞으로 차차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덕후 출판의 가장 핵심이자 어려운 점은 내 안에서 상충하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세계관 사이에서 '어떻게 나의 중심을 잡느냐'인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꿈을 꾸잖아. 이상한 이 현실에서도.
비현실적이라고 눈을 흘기는 네가 난 더 불쌍해.
<아이돌> 자우림
그러니까 나(덕후)를 보며 비현실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세계관에서는 나만큼 현실적인 사람도 없다고 크게 소리 내어 받아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지금, 롸잇나우!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데 이만큼 현실적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