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트리 Jan 05. 2024

'어떤 읽기' 나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읽기 문화를 되돌아보며

'어떤 읽기'라는 주제로 내일까지 글을 써야 한다. 어쩌다가 이 주제에 닻을 내리게 되었는가 정리를 좀 해보자. 작년 초에 스피박의 <읽기>라는 책을 읽기로 하면서 '읽기'라는 주제가 던져졌다. 그런데 '읽기'라는 주제가 좀 광범위해야지. 그리고 스피박의 책은 철학적 계보와 맥락을 알아야 해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현실과 엮기에는 조금 동떨어져 보였다. 물론 엮으려고 하면 할 수야 있겠지만 굳이 그래야 할까 하는 생각,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이다.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를 업계 용어로 말하자면 '유통과 서평(읽기) 문화'다. 뭔가 잘못되어 있는데 비판할 대상이나 포인트가 한두 가지가 아니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짚어볼 만한 포인트는 몇 가지로 나뉘는데...


_출판사(편집자 또는 발행인)로서 책을 공식적으로 소개하는 글인 '보도자료'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에 대한 고민이다. 누구를 향해 어떤 효과를 바라며 이 글을 쓰는가. 보도자료를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쓰는 게 과연 자연스러운 순서인가? 책이 출간된 후 독자의 반응을 보고 쓰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가? 오히려 보도자료를 낸 후에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그게 마치 출판사에서는 할 일을 다했다는 마침표인 것처럼.

_출판사에서 책에 덧붙이는 또 하나의 글은 바로 '추천사'다. '추천사'는 과연 추천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_'읽기'는 너무 텍스트 중심적이진 않은가? 읽기 자체에 대한 재발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범)

_책을 진심으로 읽는 사람과 가볍게 읽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_책을 안 읽는 세태가 과연 사회의 위기인가? 누군가는 읽는 양 자체는 과거보다 지금이 더 늘었다고 말한다.

_출판하는 책의 보도자료를 쓰는 경험을 생각하며 '책에 대한 글'을 쓴다?책에 관련된 읽기와 쓰기에서 시작. 사적인 경험에서 시작. 각자 하고 싶은 얘기로 뻗어나가면 좋을 것 같다. (제안)


작년 중반에는 생각이 너무 확장되어 '(안) 읽기 문화'에 대한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책은 나와 엄마 사이의 대화 주제가 될 수 이ㅛ을까


어떤 읽기들의 공존. 이성적인 덕질과 감정적인 덕질. 영상 콘텐츠를 주로 즐기며 책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 책과 어떻게 친해질지 모르는 사람들. 어릴 때 필수과목이어야 한다고 나오는 것들 중에 노동법, 재태크, 자기표현법, 몸쓰기 등이 있는데, 책과 관계맺기도 하나 추가되면 좋겠다. 혐관도 괜찮으니까 뭐라도 관계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만약 '읽기'와 관련해 인터뷰를 한다면 '1년에 책을 한 권 이하로 읽으며 서점을 방문하는 횟수도 1회 이하인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싶다. 


읽기와 쓰기의 관계. 팟캐스트를 하다가 "모든 사람이 책을 써도 괜찮다고 보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무조건 "예스!"다. 책을 쓰려면 읽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세계가 확장되는 입구는 다양한데, 쓰기는 그중에서도 읽기로 연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갑자기 이 이야기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존재해라, 그냥, 쓸모 없게 느껴질지라도. 라고 말을 해도 그 말을 전하고 싶은 대상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자기 언어가 없는 사람은 무시를 당한다. 권위 있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자리 자체가 그들의 언어가 되고 힘의 흐름에 따라 세상에 노출된다. 

하지만 불공평한 세상을 바꾸겠답시도 어줍짢은 정의감으로 언어가 없는 사람들을 강제로 계몽하는 것도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그저 삶에 충실할 뿐인데 기울어진 세상에 존재하느라 불평등한 상황과 아픔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고 세상에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술 기록가. 그래, 여기서 스피박의 <읽기>가 떠오른다. 그들의 말을 온전히 전달할 수는 없다. 구술 기록가의 존재는 마치 번역가가 원서와 똑같은 번역서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드러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낫지 않은가. 스포츠 중계 중에 편파적인 중계라는 게 있다고 한다. 내가 편파적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서 듣는 사람에게 알아서 편파적인 말들임을 확실히 기억하고 나름대로 균형을 맞출 정보값을 설정하고 중계자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중간쯤으로 돌아와서 계몽이 정말 그렇게 나쁜가? 물론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려드는 행위'를 '극혐'한다. 네가 뭔데? 너 뭐 돼? 얼마나 똑똑하길래? 세상 모든 정보가 유튜브에 있는데 네가 챗GPT보다 많이 알아? 뭘 어떻게 가르쳐줄건데? 그래서 내 인생이 얼마나 펴는데? 돈을 벌 수 있어?

여기서 '계몽'을 덜 불편하게(!) '훈련'으로 바꾼다면? 회사에 복종하고 야근하며 열심히 일하게 하는 노동자를 기르는 훈련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생각하는 인간을 기르는 훈련은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떤 훈련은 되고 안 되고를 정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는 어느새 어떤 읽기에서 어떤 대화로 넘어간다. 혼자 읽기는 사실 우리가 논할 대상이 아니다. 읽고 쓰고 발화하고 섞이고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그런 순환하는 읽기 문화의 중심에는 결국 '대화'가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 속에는 책이 얼마나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가? 독서를 내세운 대표적인 플랫폼들은 '읽기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사업화하고 있는가? 그 사업이 흥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지금 한국의 '읽기 문화'를 비추는 큰 거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읽기 문화는 별로 반갑지 않다. 


종이책의 한계와 가능성

명시적인 끝이 있다는 것.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코드(쪽번호)가 있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