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희 Jan 12. 2024

발칸 여행1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시작하다

  발칸반도!   


  크로아티아란 나라 외에는 이름이 생소한 나라들로 꽉 차 있는 곳. 유럽의 화약고로 알려진 곳을 여행하게  되었다. 크로아티아라는 여행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접한 적이 있을뿐 아니라 축구 잘하는 나라로 알려져있어 낯설지 않았지만 나머지 여행했던 3나라,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몬테네그로는 발음 하기도 힘들고 잘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였다.     


  이번 4개국을 여행하고 난 느낌을 한 마디로 얘기하면, 너무나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지만 아픈 역사로 인해 왠지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나라들...

발칸반도


  이번에 여행하게 된 된 발칸반도는 지중해 아드리아해를 끼고 이탈리아 오른편에 있는 반도로 맨 아래 쪽에는 그리스가 있고 맨 윗 쪽에는 이번에 여행한 슬로베니아가 있다.  발칸반도 오른 쪽에는 흑해와 튀르키에(터키)가 있다. 그 가운데 10여 개의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복잡하게 자리하고 있다.  지도를 보기만 해도 어지러울 지경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많은 것은 최근에 독립한 국가들도 있기 때문이다. 몬테네그로와 같은 나라들은 2006년에 독립하여 독립한 지 아직 20년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나라들이 오늘날의 국가 모습을 갖추기 위해 여러 번의 내전과 전쟁을 겪었다.


구. 유고슬라비아연방

     

  우리들에게 익숙한 이름은 유고슬라비아다. 이번에 여행한 나라들은 모두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했던 나라들이었다가 지금은 7개 나라로 갈라져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유고의 지도자 티토 정권에서는 하나였던 나라들이 지금은 갈라져 여러 나라로 독립된 것이다. 그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면 다른 종교과  민족주의였다.


  유고는 '남쪽에 사는 슬라브인'이라는 의미라 한다. 슬라브 민족의 중심은 러시아다. 러시아에 살던 슬라브 민족이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만든 나라들이 지금의 동유럽을 구성하고 있다. 그중 발칸반도에 내려와 살던 슬라브인들을 남슬라브인이라고 한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남쪽에 사는 슬라브인들의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만든 나라다. 근데 왜 갈라졌을까? 우리 나라도 같은 한민족이라고는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에다 삼한까지 지역별도 분리되어 살았다. 지금도 제주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라는 지역을 놓고 보면 지역별로 조금씩 다른 특성이 있다. 이러한 지역주의가 심화되면 지역 중심의 민족주의가 자라게 된다. 물론, 발칸지역에는 범 슬라브계통의 민족 외에도 그리스계, 알바니아계, 헝가리계, 튀르크계 등의 민족이 섞였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종교에서 비롯되는 편향성이 있다. 뿌리는 하나지만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까지... 이런 종교적인 차이에 지역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가 갈등의 원인이 되어 서로 물고 물리는 전쟁과 내전이 반복되면서 반도 내에서 하나의 국가로 살던 민족이 서로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 몇몇 국가들의 줄어든 인구 통계와 여행하면서 곳곳에 보이는 빈집들이 이곳 국가들의 아픔을 말해 주고 있었다. 심지어 ‘발칸화’란 단어가 생겼을 정도다. 인터넷에서 발칸화란 단어를 입력해 보면 “어떤 나라나 지역이 서로 적대적이거나 비협조적인 여러 개의 작은 나라나 지역으로 쪼개지는 현상을 일컫는 지정학적 용어(위키백과)”를 말한다고 되어 있을 정도다.     


  종교는 왜 달라졌을까? 역사적으로 발칸반도는 동로마와 서로마의 중간에 해당한다. 서로마는 가톨릭이었고, 동로마는 그리스 정교가 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다. 그리고 발칸반도는 동양과 서양이 접하는 지역이다. 서쪽의 유럽을 대표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동쪽의 오스만투르크의 대결장이었다. 오스만투르크는 종교가 이슬람이다. 이 발칸반도는 고대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중세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와 오스만투르크이 득세할 때마다 지배하는 주인이 번갈아 바뀐 장소였다. 새로운 세력이 점령할 때마다 점령자의 종교를 강요하게 되면서 국가별로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종교를 갖게 된 것이다.  발칸반도 중에서도 서쪽에 치우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서쪽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을 많이 믿고, 동쪽에 속한 몬테네그로와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에는 동쪽의 영향을 받아 정교회와 이슬람을 믿는 사람이 많이 분포한다. 크로아티아는 가톨릭 신자가 88%, 슬로베니아는 58%나 되고, 몬테네그로는 정교회 72%, 이슬람 19%다. 중간에 있는 보-헤가 가장 복잡하다. 그래서 내전이 가장 심했던 나라이기도 하고 이름도 복잡하게 되었다. 보-헤는 이슬람교 50.7%, 정교 30.7%, 로마 가톨릭 15.2% 순이다. 보-헤는 종교 비율만큼 민족도 나눠져 있다. 그래서 내전이 가장 심했던 나라이고 지금도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는 나라다.

     

파랑:세르비아인, 녹색:보스니아인, 주황:크로아티아인


  맨 처음 방문한 곳은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였다.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의 수도다. 나는 크로아티아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격투기 선수 크로캅이다. 러시아 효도르와 격투기 세계 쌍벽을 이루던 인물로 키도 크고 매너도 좋았던 격투기 선수로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듯이 월드컵 무대에서의 두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나라다. 피파랭킹 도 10위일뿐 아니라 각종 유럽리그에 이어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하고 최근 카타르 월드컵에서 3위를 한 나라다(이를 보면, 14억이 넘는 중국이 축구를 못하는 것,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나라 모습은 곡갱이, 초승달 형태를 띠고 있는데 국토 면적은 8.8만㎢로 10만㎢의 남한보다 조금 적지만 인구는 400만 정도밖에 안된다. 91년도에 470만에서 인구가 줄었다. 저출산 등의 영향도 있지만 그간 있었던 전쟁으로 인한 영향도 크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인구만큼 많은 400만 인구가 국외에 살고 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나은 돈벌이를 위해 혹은 전쟁을 피해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사는 인구가 국내 인구만큼 많다. 그래서 크로아티아는 이들을 대표하는 선거구를 따로 두고 3명의 의원을 뽑아 국회를 운영한다고 한다.     


크로아티아 지도(세계여행정보)


  수도 자그레브에서는 77만의 인구가 산다. 우리나라 서울 송파구 인구(65만) 정도밖에 안되지만 크로아티아 전체 인구의 20% 정도가 사는 곳이다. 현재는 크로아티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 도시지만 고대에는 해안 중심으로 활동이 이루어졌으므로 이번에 방문했던 아드리아 해안도시 드보르브니크, 스플리트, 자다르와 같은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도시였다. 무려 14시간을 비행기에서 3끼 식사를 하며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아침부터 시작하는 유럽 여행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시작된다. 자그레브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8시,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4시쯤 되는 시간에 여행을 시작한다. 몽롱한 상태에서 펼쳐진 동유럽 도시 자그레브는 스산하게 느껴졌다. 눈에 들어오는 고풍스런 건물과 아침 출근을 서두르는 시민들의 늘씬한 외모가 유럽에 와 있는 나를 실감케  했다.


자그레브 시내 모습

         

  맨 처음 간 곳은 수리 중인 자그레브 대성당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알게된 것 중 하나는 도시마다 대성당이 있고 그 성당의 이름은 '성모승천대성당'이라고 불려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별도의 성당이름이 있다. 자그레브 대성당의 이름음 '성 스테판'이다. 그럼에도 그 지역에 가장 큰 성당은 그 지역 이름에다 대성당을 붙여 부르니 굳이 이름을 알 필요가 없어 편하기는 하다.  이곳 성당들의 역사는 대충 비슷한 절차를 거치 오늘날에 이르는데 1000년 주변에 건립되어 여러 가지 이유로 화재와 파괴 그리고 복구를 거쳐 오늘 날에 이르면서 복구시점의 건축양식(고딕, 바로크, 로마네스크 양식)이 반영되어 으로 이루어진 성당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스토리다. 복구 중이라 관람할 수는 없었는데, 5천 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거대한 성당이며 보물급 유물이 10개 이상 보관되어 크로아티아의 보물이라고 부르고 화폐에서 나올 정도라니 크로아티아를 상징하는 건물이라 할 수 있겠다. 105미터, 104미터에  이르는 두 개의 첨탑이 상징적인 성당이다.  

수리 중인 자그레브 성당과 성당 앞 성모상


  자그레브 시내를 21명이 활보하며 이동한 곳은 돌락 과일 시장이었다. 꽤 넓은 장터에 각종 과일을 놓고 팔 수 있는 판매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른 아침인데도 몇몇 상인들은 형형색색을 과일을 펼쳐놓고 손님을 맞고 있었다. 한국은 올해 과일 가격이 만만치 않는데 이곳은 관광업 외에는 농업이 주요 산업이어서인지 과일이 무지하게 싸다는 생각을 했다. 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시지않고 단맛만 나는 만다린이 제철이라는 가이드 말에 눈으로만 보다가 귀국할 때쯤에야 십여 개를 1유로도 안되는 가격에 사서 맛볼 수 있었다.  

 

돌락 과일시장

    이동 중에 어떤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넥타이 가게였다. 넥타이의 원조가 크로아티아인데 크로아티아에 있는 유명한 수제 넥타이 가게 중 한 집이라고 한다. 17세기 유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30년 종교전쟁이 있었는데, 당시 크로아티아는 프랑스 속국이었고 프랑스가 크로아티아의 병사를 출정할 때 무사히 돌아오라는 의미로 목에 빨간 스카프를 감아 주었는데,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루이 14세가 관심을 보이며 그것이 뭐냐고 묻자 질문을 뜻을 이해하지 못한 병사가 크로아티아 병사란 의미의 크라바트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이와 같은 형태의 넥타이 제품을 생산하며 그것을 크라바트라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넥타이가 통용되기 시작했으니 크로아티아가 넥타이의 원조이고 우리들이 지나면서 본 가게 이름도 크라바트란 상호를 가지고 있었다.     

수제 넥타이 가게

                                                          

  자그레브 시내를 걷는 동안 공사를 위해 가려진 건물 모습에서 그리고 실제로 금이 간 건물 모습에서 2020년 큰 지진의 영향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유럽 도시를 지나치면 종종 검은 기마상을 마주하는데 그 지역의 인물을 상징하고 있다. 자그레브 시에서 먼저 마주한 기마상은 성 조지상이었다. 성 조지는 많은 이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켜 추앙받는 인물이라 했는데 그의 말 발굽 아래 이무기는 이교도들을 상징한다고 했다. 종교가 다르다고 억압하고 배척한 사람이 영웅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에서 한 쪽에서의 영웅은 다른 편에서는 원수가 된다는 생각에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성 조지상


  정겨운 자갈 길은 내가 유럽에 와 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중요한 표식 중 하나다. 아스팔트나 시멘트 도로는 속도를 연상케 하지만 자갈 도로는 사람을 느긋하게 한다. 그 자갈 길 사이로 물 흐르듯 흐르는 전차들은 부딪혀도 다칠 것 같지 않은 묘한 친근감으로 스윽 다가 왔다가 슥 사라진다. 그리고 골목마다 예술작품처럼 갈겨져 있는 낙서들이 사람 사는 푸근한 곳은 이래야 함을 알려주는 것 같아 좋다. 최근 우리나라 덕수궁 낙서 사건에 대한 반응과 대비되어 더욱 그렇다. 그리고 길가를 빼곡히 점령하고 있는 식탁과 의자들, 지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이 주는 매력도 빼 놓을 수 없는 유럽의 매력이다. 쌀쌀한 날씨에 먼지 나는 길 가에서 굳이 바깥에 앉아 차 마시고 식사하는 모습이 우리들의 시각에는 비효율과 비합리의 시각에서 볼 수 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한다. 그래서 더 정겹다.        


  스톤게이트는 석문, 돌로 된 문인데 이곳을 지나야 성 마르코 성당이 나온다. 석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를 하고 있다. 이곳은 자그레브에 남아있는 중세 석문이라는데 이곳이 유명해진 이유는 18세기에 큰 화재가 있어 모든 것이 불타버렸으나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 그림만 타지 않아 유명하게 된 곳이다. 나중에 이곳에 조그만 성당을 짓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의 장소로 여기며 기도를 하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기적의 장소가 많은 데 그중 하나인 셈인데, 종교가 없는 우리들에게는 기도가 낯선 일이긴 해도 그런 스토리와 주위 사람들의 엄숙한 표정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된다.         

  이리 저리 눈을 돌리며 걷는 가운데 벽의 중간에 새겨진 인물 한 사람이 들어온다. 테슬라라고 한다. 지금 제일 잘 나가는 테슬라가 아니라 에디슨과 경쟁했던 교류전기의 선구자 테슬라로 이곳 사람이라 한다. 우리는 에디슨만 기억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교류와 직렬 방식 경쟁에서 둘은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갖은 권모술수로 승리한 에디슨만 기억하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테슬라의 교류전기가 승자가 되었어야 했던 사실은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다. 역사에서 이런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나는 것 같다.     


  이곳에서 만난 또 한 인물, 마토스. 이곳 최고의 사립고등학교 벽 옆에 있었는데 공사 중이서인지 누런 합판으로 둘러쌓여 있었따. 마토스는 은색 동상으로 은색 벤치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그가 사랑했던 자그레브 시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토스는 평화로운 시로 당시 억압받던 크로아티아에 사랑을 노래했다. 마토스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하에서 징집되었다 탈영하여 13년 만에야 사면받아 꿈에 그리던 고향, 자그레브에 돌아왔지만 얼마 못살고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다음 관광지는 자그레브의 랜드마크라 할만한 성 마르코 성당이었다. 성 마르코 성당은 지붕 모습이 아주 예쁘다. 지붕 전체가 크로아티아 국기와 자그레브시 문양의 타일 모자이크로 되어 있어 이곳 젊은이들 사이에 최고의 결혼식 장소로 꼽힐 정도라 한다. 이 성당이 자그레브에서는 가장 오래된 성당(앞의 자그레브 대성당 건립연도가 1102년이라는데???)이라 하는데 이 성당의 스토리도 비슷하다. 1256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여러 차례 복구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오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 성당 측면에는 예수님의 12제자 조각상이 있었는데 예술적 가치가 높아 남동유럽에서는 최고의 보물로 여긴다고 했다.

 

  반 옐라치치 광장은 우리 나라의 광화문 광장 같은 장소다. 유럽은 사람들이 모이고 각종 관공시실이 집결되어 있는 곳이 광장이다. 그리고 그 광장 중앙에는 국민들이 사랑하고 존경한 인물의 동상이 자리한다. 반 옐라치치 광장에는 반 옐라치치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광장에는 크리스마스 축제에 이은 연말연시를 맞는 불빛들이 찬란하다. 이곳에 가장 큰 상가와 주요 건물들이 밀집해 있다. 반 옐라치치는 크로아티아를 대표하는 민족주의자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당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위해 싸운 인물이다. 이 광장은 크로아티가 공산화 되면서 공화국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1991년 내전 이후 다시 제 이름을 찾았다고 한다. 동상도 같은 정치적인 이유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정말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슬로베니아로 넘어 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