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령에 속해 있지만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작은 티벳이라고 불리는 라다크! 라다크는 ‘산길의 땅’이라는 뜻이라 한다. 이름과 딱 맞는 나라 고산 지대에서 척박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라다크를 다녀왔다.
3,000미터에서 5,000미터 고지의 레 라다크, 7박 8일 여행. 보통 사람들도 고산증으로 힘들다는 라다크를 갑자기 심혈관 시술을 하게 된 나는 약만 잘 복용하면 괜찮을 거라는 의사 말을 믿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살아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선, 아직도 여행할 곳이 넘치도록 많은데 하필이면 왜 라다크 여행을 택했을까? 이번에 여행을 함께한 일행은 20명이었는데 여행객 끼리도 가장 먼저 던졌던 질문이다. 대체로 세 부류였는데, 여행 경험이 넘쳐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온 여행객이 한 부류이고, 두 번째는 잘 모르고 인도의 한 지역인데 북부 지역이고 고산 지역이라라 시원할 것이라 생각하고 온 부류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다크에 대해 미리 알고 라다크를 경험하고 싶어 온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나의 경우는 마지막의 경우고 우리 팀 외에 한 팀이 더 있었다. 두 번째 잘 모르고 온 부류가 가장 많았다.
오래된 미래 구글 이미지 스크랩
라다크를 알게 된 것은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지음, 스웨덴 언어학자, 사회운동가)’라는 책을 통해서다. 호지 씨가 이 책은 쓴 것은 약 30년 전이다. 라다크에 16년간 머물면서 그 삶을 추적 연구하여 펴낸 보고서다. 산업화 자본주의화 되면서 생기는 수많은 문제점에 대한 해답을 라다크 주민의 연구에서 찾으려 했다.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가족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자급경제 시스템에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라다크 인들의 모습에서 우리 미래의 해법을 제시하려 했다.
노동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는 사회, 모든 일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공동으로 하고 경쟁의식을 찾아 볼 수 없는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되는 화폐가 필요없는 사회, 인간과 대지 그리고 동물을 하나로 연결하는 친밀한 관계가 살아있는 사회, 심지어 가장 심한 욕이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 정도로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사회... 이런 모습의 라다크를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었으나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생각해 보면, 최근에 만들어진 팩키지 프로그램에다 라다크인의 삶을 전혀 모르는 경험 적은 인도 도시지역(뉴델리) 출신의 현지 가이드에게서 이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단지, 현재 개발 중인 라다크 모습과 도시 중심으로 살아가는 라다크 인 모습만 경험할 수 있었다.
라다크는 인도 북부지방에 있는 지역 이름이다. 인도 델리에서 900키로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3천 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에 있는 지역이다. 인도령이기는 하지만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민족이고 다른 문화를 갖고 있다. 그래서 2019년부터는 인도에서 연방직할지로 분리되어 있다. 그렇지만, 중국(티벳)과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군사적으로는 의미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7박 8일 동안 거리에서 가장 활기찬 조직은 군대 행렬이나 군인 조직이었던 것 같다.
라다크 여행지도(여행사 자료 변경)
라다크는 약 6만㎢로 남한 10만에 비해 60%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고(어떤 자료에서는 8.5만㎢로 남한의 90% 수준이라고 한다.) 북쪽으로는 카라코름산맥, 아래 인도지역과는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역이다. 평균 고도가 3천 미터가 넘는 고산지역에다 농사는 2월~6월 5달밖에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이다. 인구는 27만에 불과해 인구밀도가 지극히 낮은 곳이다. 라다크의 가장 큰 도시는 레(LEH)인데 3.5만 정도가 살고 있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라다크 북부지역은 실크로드로 무역로로 동서 교역의 중심이었던 곳이었다 한다.
이번 라다크 여행을 돌아보면 크게 세 가지를 경험하는 여행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하나는 고산 지대를 경험해 보는 것이다. 3,000미터가 넘는 레라고 하는 도시에 숙소를 정하고 5천 미터를 넘은 고갯길 두 곳을 경험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도의 유명한 영화 ‘세 얼간이’의 마지막 배경이 된 4천 미터 높이에 있는 바다가 호수로 된 판공초(판공호)이고, 마지막은 8군데 사찰(이곳 용어로 곰파)을 둘러보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만약 불교 신자라면 마지막에 언급한 8곳의 사찰을 보는 것이 여행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내가 기대했던 라다크 사람들의 생활, 문화를 경험할 수 없었다. 여행 막바지에 전통가옥 전통음식을 경험하는 시간이 있었으나 우리의 민속촌 같이 만들어진 장소이고 거기 거주하는 분들도 도시화된 현대 라다크인이라 ‘오래된 미래’에서 알았던 라다크인의 생활과 문화를 확인할 수 없었다.
고산지대 여행, 쉽게 볼 일이 아니다.
인도 뉴델리에서 900키로 이상 떨어진 라다크 주도 레(LEH)에 도착했을 때가 오전 9시 경이었다. 그런데 오후 4시까지는 휴식이라 한다. 거금을 들여 여행 왔는데 장장 7시간 동안 호텔에서 쉬라니?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호텔에 내려 놓은 과자 봉지, 김 봉지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아... 우리 몸이 이런 상태이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가이드 말대로 일단 쉬었다. 4시가 되어 일정 중 비교적 낮은 곳에 위치한 산티스투파라는 일본인이 만들어 놓은 불탑을 올랐는데 역시 만만찮다. 호흡이 힘들고 무려 7시간 이상 휴식을 취했다고는 하나 몸이 파김치가 되었다. 걸음을 옮기기가 만만찮았다.
여행사에서 준비한 고산증 약을 복용을 했지만 머리가 띵하고 호흡이 가빴다. 가이드는 최대한 천천히 걷고 적게 먹고(많이 먹으면 산소가 소화하는 곳에 집중하기 때문) 물을 많이 마시고 심호흡을 하라고 한다. 그렇게 고산지대에 적응하면서 하루를 시작했지만, 라다크에서 3일, 4일째 여행에서 경험한 5천 미터 높이에서는 미리 적응했다는 게 아무 의미없을 정도였다. 일행 중 한 분은 걷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몇 분은 후반기 일정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내의 경우, 고산증의 증상인 코피, 두통, 설사가 한꺼번에 며칠씩 나타나 고생하기도 했다. 심지어 델리서 온 이곳 가이드도 몸이 힘들어 하루는 다른 가이드로 대체할 정도였다.
창 라(고개)
일정 중에 5천 미터 이상의 고개 통과가 두 번 있었는데, 레의 서쪽 카루둥 라(고개)와 동쪽 판공호로 가는 창 라(고개)길이다. 둘의 높이는 모두 5,360미터로 비슷하다.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고개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 움링 고개로 5,800미터라 한다. 고개 정상에 오르면 일단 기온이 확 달라진다. 레에서는 여름 날씨였는데, 이곳에서는 긴팔 옷이 필요할 정도로 쌀쌀하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 정상의 잔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차에서 내려서 바로 걷기가 쉽지 않다. 호흡이 힘들 뿐 아니라 어지러워 곧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다. 천천히 걸어도 호흡이 가쁘다. 그래도 5천 미터가 넘는 고갯길에 서 있다는 자부심 같은 게 있었다. 이곳을 경험하니 히말라야의 K2와 같이 8천 미터도 넘는 산악을 정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 경외감 같은 것이 생겼다. 우리는 차로 이동했지만 이곳을 정복하기 위해 오토바이 동호회에서 찾아온 외국인 행렬, 심지어는 자전거만으로 큰 배낭을 싣고 올라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냥 오르기도 쉽지 않을텐데 자전거로 호흡하며 오르는 사람들의 정신력과 체력이 부러웠다.
4,225미터 높이 132키로의 판공초(판공호수)
판공초는 레에 도착한 3일째 갔는데 레에서 서쪽 지역인 누브라 계곡에서 동쪽 지역인 판공초로 이동한 것이라 무료 6시간 이상 험한 길을 달려 다다를 수 있었다. 서쪽의 누브라 계곡 또한 일품이다. 이곳 지역은 풀이 거의 없는 거치 바위와 모래, 자갈로 이루어진 산악 지역이 대부분이라 황량한 회색 산과 황토색 강과 개울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끔 녹색 지역을 통과 하였는데 이곳에 야크, 소 등의 가축들이 풀을 뜯는 모습이 보였고 주변에 가옥이 흩어져 있었다. 이곳의 주요 가축은 ‘쪼’라고 야크와 소의 교배종이라 했는데, 레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잘 모를 정도로 과거의 얘기인 듯 했다.
판공초로 이동하는 6시간은 이곳 운전사들의 곡예를 보는 시간이었다. 인도에는 세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나쁜 길, 그리고 매우 나쁜 길이고 나머지 하나는 만들어서 가는 길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째 길까지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특히 전날 폭우가 와서 유실된 길이 많아서였고 실제 차량 고장으로 직접 고쳐 이동하기도 했다. 주변 경관이야 아름다웠지만 길이 험해 굉장히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깍아지듯 만들어져 있는 절벽 좁은 길을 이동하면서 수시로 추월하면서 이동하는데 차량은 안전밸트, 손잡이, 팔걸이까지 없는 차량이라 그럴 때 마다 가슴이 쫄깃해졌다. 폭우로 무릎 위까지 물에 잠긴 도로 2-30미터의 거리를 물을 가르며 건널때는 일행이 절로 박수가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차량에 에어콘과 썬팅이 되어있지 않아 강한 직사광선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위험한(?) 여행 상품이 어떻게 허가가 났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길이 132카로 판공초
판공초에 이르는 길의 산의 모습 또한 환상적이었다. 횐색과 황토색의 섞인 유화로 그린 듯한 다양한 빛깔의 회색산의 모습의 끝 지점에 영롱한 옥빛 판공초의 모습이 나타났다. 판공초는 7천 만년 전에 아시아대륙과 인도대륙이 부딪쳐 바다가 융기하여 생긴 호수라 한다. 그래서 바다와 민물 고기가 동시에 존재하며 염분을 담고 있는 기수호(물1리터에 무기염류 0.5그람 이상 함유)라고 한다. 판공초의 길에는 132키로미터에 달하고 폭은 5키로, 중국령에 50%, 라다크 쪽에 40%, 10%는 완충지대라 한다.
영화 세 얼간이에 나오는 판공초
판공초도 4,225미터 높이에 있는 호수라 고산증에 대한 영향이 없지 않았지만 바다와 같이 확 트인 공간, 눈으로 덮힌 주위 산들에 빠져 잠시 고산증을 망각(?)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양한 포즈로 기념 사진을 남기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티벳불교 사찰(곰파)
세 번째 관광은 티벳불교의 상징 곰파(사찰)를 경험하는 것이다. 라다크에 30개의 곰파가 있다고 하는데 이중 우리는 8개의 곰파를 둘러봤다. 마치 유럽에 가면 성당을 둘러보는 식이다. 나중에는 이 성당이 그 성당같고 저 성당이 이 성당 같아 헷갈리는 것처럼 이곳도 비슷했다. 곰파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었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라다크에는 기원전에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어 대다수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는데 현재는 달라이 라마의 정신적 지도 아래 티벳 대승불교가 라다크 불교를 대표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2011년 기준 이슬람 인구는 46.41%, 불교를 믿는 인구는 39.65%, 힌두교 인구는 12.11%로(나무위키 자료)로 이슬람인구가 많은데 넓은 지역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이어서인지 아니면 불교 사찰 위주의 관광이서인지 이슬람 사원을 볼 수는 없었다. 주도에 해당하는 레 지역에서는 불교(47%), 힌두교(35%)나 이슬람 교도(15%)로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레 개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비중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생 부처를 모시는 모습
라다크의 곰파를 경험하면서 남아있는 몇 가지 공통점을 말해보면, 먼저 입구의 마니차이다. 형태와 종류는 다양했지만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한번 읽는 것을 대신할 수 있다는 도구라 하는데 티벳불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당시 글을 모르는 불자들에 대한 배려라 생각되었다. 다음은 주로 흰색으로 된 쵸르텐이라는 불탑이 곳곳에 있었는데 인도의 스투파가 발전 변형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main temple로 적혀 있는 우리의 대웅전은 중앙에 큰 불상이 있는 것은 동일하나 그 좌우에 달라이라마와 현지 환생부처로 숭상되고 있는 라마의 사진이 걸려 있어 함께 숭배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둥근 형태의 납작한 북이 있었는데 불경을 욀 때 박자를 맞추기 위한 용도로 쓰여지는 것 같았다. 우리 나라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큰 종이 설치되어 있는 사찰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곰파(사찰)는 우리처럼 산기슭에 위치해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사찰이 위치한 장소처럼 무성한 나무가 없는 지역이라 회색빛 산 위에 건립된 하얀 색 아파트 혹은 빌라촌처럼 보였다.
디스켓곰파
틱세곰파
여행 말미에 방문했던 해미스곰파는 규모가 가장 크면서 부유한 사찰이었는데 삼사라(윤회)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고, 매년 6월 파드마바바(티벳 탄트라불교의 개조가 되었으며, 오늘 날까지도 티벳 역사상 최고 성인으로 추앙받음)를 기념하여 축제가 열리는 장소라 해서 유명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사찰 내 있는 박물관에는 이곳 불교의 여러 유적물이 보관되어 있어 특별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었다. 외에도 레에서 2곳 산티스투파(의미 : 평화의 탑), 이곳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면서 14대 달라이 라마가 오면 머문다는 상카라곰파를 보았고, 달표면처럼 생긴 문랜드 지방인 라마유르에 있는 라마유르 곰파, 당대의 최고의 번역가이면서 외교가였던 린첸에 의해 설립된 알치 곰파(사진 촬영 불가지역), 강 모레 사막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누브라 계곡에 있는 디스켓 곰파, 레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서 옛 왕국의 여름 궁전 역할을 했었다는 쉐곰파, 그리고 앞의 디스켓 곰파의 본사(本寺)이면서 승려들의 양성소와 교육기관 역할을 하는 틱시곰파 등을 둘러볼 수 있었다.
헤미스 곰파 축제 모습(인터넷 사진)
레는 라다크의 한 도시명이다. 그런데 왜 라다크 여행이라 하지 않고 레 라다크라고 했을까?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레 왕국과 라다크 왕국이 별도로 있었기 때문이라 하는데 어느 나라든 과거에는 여러 왕국으로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에 석연치 않다. 아마도 라다크에서 레라고 하는 도시의 관광 비중이 크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개인 생각이다.
아무튼 7박 8일을 견뎌(?)낸 일행들의 생각은 한마디로 요약 하면, ‘살아서 와서 다행이다.’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일반 여행 상품으로 오픈하기에는 안전 면에서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이는 여행 상품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어려운 훈련을 마치고 난 보람 같은 기분이 남아 여행 후 느낌이 나쁘지는 않다.
무엇보다 책에서 봤던 라다크 인들의 삶 그 자체를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우리들이 만나는 그 지역 사람들(개발 과정에서 인도 도시 지역 사람이 많이 넘어갔을 수도 있음)은 대체로 순박하고 밝은 모습이었다. 여행 이틀 후에 아내는 이곳에서는 물건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어요... 라는 말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현재 라다크 상황을 잘 대변해 주는 말이 있다. 라다크를 개발하고 있는 개발국장의 말이다. “라다크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그곳 사람들을 탐욕스럽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을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이곳 농부의 말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농작물은 아주 우수하답니다. 서구에서 사용하는 화학 물질을 7가지나 사용했거든요.”
호지 씨가 말했듯이 우리의 미래를 라다크의 옛날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현재 자본주의 문제점의 해결점을 그들의 오래된 과거 생활에서 힌트를 얻고 개선해 나간다면 어쩌면 우리의 미래는 파멸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