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정원을 다녀온 후
신카이 마코토 영화를 처음 본 건 7년 전이다. 초속 5센티미터.
영화를 같이 본 사람은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광고 대행사 신입 직원이었다. 그의 자취방에는 담배 꽁초가 쌓여있었고, 컴퓨터 D드라이브에는 좋아했던 어느 여성의 사진이 쌓여있었다. 그날 비가 와서인지 그는 연거푸 담배를 태웠고 동시에 내게 신카이 마코토의 '초속 5센티미터'를 보여주었었다. 그렇게 나는 12월 한 겨울, 마음이 가난한 남자의 자취방에서 신카이 마코토가 이야기하는 '외로움'을 보았다. 그 외로움은 혼자이기 때문에 오는 감정이 아니었다. 이미 잃어버린 어린 시절 그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이며 변해버린 자신에 대한 '서러움', 그리고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는 '외로움'이었다.
[언어의 정원]을 본 건 그로부터 3년 뒤다. 내게도 직장이란 게 생겼고 차가 생겼고 그리고 돈이 모였다. 그런데도 나는 당시 더 힘들었었다. 뭔가 정해져 버린 인생이라는 생각. 내 안의 다른 가능성들이 점차 사라져버리는 아쉬움, 그리고 점차 남들과 비슷해지는 나의 말투와 생각들. 그때 언어의 정원은 잠시 내 숨을 트이게 해주었다. '신주쿠'란 도쿄의 대도시 한 가운데 자리한 거대한 숲 [신주쿠 쿄엔] 도시 속에 상상처럼 존재하는 그 숲을 직접 가보고 싶었다.
영화 속 주인공은 구두 장인을 꿈꾸는 고등학생과 맥주에 초콜릿을 안주 삼아 먹는 20대 중후반의 직장인 여성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둘은 신주쿠 쿄엔의 정자를 찾아온다. 남자는 학교란 공간을 벗어나고, 여자는 직장이란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비에 갇힌 정자 안에서 그 둘은 세상과 담 쌓고 숨을 크게 내쉰다. 남자는 구두를 그리고 여자는 맥주에 초콜릿을 먹는다. 그리고 둘은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는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한다. 아직 많이 미흡하지만 비 오는 날이면 첫 교시를 땡땡이치고 이 공간에서 구두 스케치를 한다고. 반면 여자는 왜 비가 오는 날에 이곳을 찾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자는 왜 이곳을 찾았을까.
어른은 기댈 때가 별로 없다. 15세의 소년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돈으로 구두 가죽을 사고, 구두를 만들어 본다. 하지만 27세의 여자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원을 맴돈다. 소년이 어른 같고, 여자가 소녀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도 다르지 않은 거 같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루 업무를 다 끝내면 내일의 업무가 기다리고 있다. 회사의 올해 매출 실적을 채우면 내년 목표를 세우고 또 목표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대리가 되면 과장이 돼야 하고, 그렇게 계속 전진을 해야 한다. 우리의 나아감은 소년의 'wish'가 아니라 여자의 'should'이다. 그렇다면 벽에 부딪혔을 때,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 빗속의 신주쿠 코엔처럼 세상을 등지고 아무 생각도 안 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맥주에 초콜릿을 먹으며, 구두 장인을 꿈꾸는 소년을 만날 수 있는 이지적인 공간이.
그 공간을 만나고 싶었고, 신주쿠 코엔을 다녀왔다. 5월의 도쿄는 매우 맑았고 시원한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불었다. 비가 내리지도 않았고, 상상했던 빗 속에 갇힌 정자도 없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에는 마침내 그 정원에서 벗어난 소년과 여자처럼. 아련한 미소가 띄어져 있는 듯했다.
도쿄에 여행을 간다면. 잠시 시간을 내 신주쿠쿄엔의 정자에 앉아 보자. 비가 오는 날 맥주에 초콜릿을 가방에 담아 간다면 조금 더 셀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