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목초 한우』1

프롤로그 제주의 풀은 기억하고 있다


『제주 목초 한우』

― 섬의 풀, 소의 역사, 그리고 브랜드가 되기까지

프롤로그

제주의 풀은 기억하고 있다

제주의 풀은 말을 하지 않지만, 오랜 시간을 기억하다. 바람이 스쳐 간 자리마다, 소의 발굽이 지나간 흔적마다, 이 섬의 풀은 묵묵히 역사를 품어왔다. 한라산 중산간의 완만한 초지, 돌담 너머로 이어진 들판, 겨울에도 쉽게 얼지 않는 땅 위에서 풀은 자라고 또 자라며 사람과 가축의 삶을 지탱해 왔다. 이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있었고, 그 소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제주의 한우 이야기는 곧 이 풀의 기억에서 시작하다.

오늘날 한우는 ‘고급 육류’라는 이름으로 소비되다. 그러나 모든 한우가 같은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특히 제주 한우는 오랫동안 중심이 아닌 주변에 머물러 온 고기였다. 산업화의 기준에서도, 유통의 논리에서도, 제주 한우는 늘 예외에 가까웠다. 이 책은 그 이유를 묻는 데서 출발하다. 왜 제주의 한우는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는가, 그리고 왜 지금 다시 제주 방목 한우의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가를 차분히 되짚다.

제주는 한반도의 끝이자, 동시에 독자적인 세계였다.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제주를 늘 ‘다름’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육지에서는 논과 밭을 중심으로 농경이 발달했고, 소는 밭을 가는 노동력으로 길러졌다. 반면 제주에서는 척박한 화산토와 거센 바람 탓에 농경보다 목축이 생활의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 특히 말과 소를 풀어 기르는 방목은 제주에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에 가까운 방식이었다. 넓은 초지를 활용해 가축을 키우는 일은 이 섬에서 가장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목 중심의 목축은 근대 이후 산업화의 기준 속에서 점차 주변부로 밀려나다. 축산업이 ‘효율’과 ‘집약’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넓은 땅과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방목은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인식되었다. 축사 안에서 사료를 먹이고, 빠르게 키워 출하하는 시스템이 표준이 되었고, 제주식 방목은 시대에 뒤처진 방식처럼 취급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주 한우는 자연스럽게 산업의 중심에서 비켜서게 되었다.

제주 한우가 주변부의 고기가 된 이유는 단순히 생산량이나 경제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제주라는 공간이 지닌 역사적 조건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제주는 오랫동안 국가 권력과 산업 자본의 중심에서 떨어진 곳이었다. 군사적 요충지이자 유배지였고, 동시에 중앙의 시선에서 벗어난 변방이었다. 이 변방성은 제주 농업과 축산의 성격을 규정지었다. 대규모 집약형 농업이 자리 잡기 어려웠던 대신,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방식이 오래 유지되었다.

제주에서 소는 단순한 상품 이전에 삶의 일부였다. 소는 들판에서 풀을 뜯고, 사람은 그 곁에서 농사를 짓고 바다로 나갔다. 마을 단위로 운영된 공동목장은 개인의 소유를 넘어 공동체의 질서를 반영하는 공간이었다. 방목은 단지 사육 방식이 아니라, 제주 사회가 자연과 맺어온 관계의 표현이었다. 풀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고, 소 또한 철저히 통제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연의 리듬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였다.

이러한 방목 문화는 제주 한우의 성격을 결정지었다. 제주에서 자란 한우는 빠르게 살을 찌우는 대신, 천천히 자라며 몸을 만들었다. 들판을 오르내리며 자연스럽게 운동하고, 계절에 따라 풀의 맛과 질이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이 과정은 고기의 성질에도 영향을 미쳤다. 근육은 단단해지고, 지방은 과하지 않으며, 맛은 담백한 방향으로 형성되었다. 이는 산업적으로는 표준화하기 어려운 특성이었고, 시장에서는 쉽게 설명하기 힘든 가치였다.

산업화는 이러한 특성을 장점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규격화되지 않은 고기, 생산성이 낮은 고기로 분류했다. 제주 한우는 ‘맛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비싸다’, ‘특징이 애매하다’는 이유로 주류 시장에서 밀려났다. 브랜드가 만들어지기 이전, 제주 한우는 늘 설명되지 않은 고기였다. 그 결과 제주 한우의 역사는 오랫동안 기록되지 않았고, 말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의 풀은 그 시간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어떤 브랜드가 붙지 않아도, 풀을 뜯고 자라난 한우와 그를 키운 사람들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산업이 주목하지 않았던 방식, 효율의 논리에서 배제되었던 선택들은 사실 제주가 자연과 맺어온 오래된 합의였다. 방목은 뒤처진 방식이 아니라, 이 섬이 선택한 질서였다.

시간이 흐르며 아이러니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환경과 건강,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가 다시 중요해지면서, 방목이라는 방식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축사 중심의 집약 축산이 남긴 문제들이 드러나자, 자연에 가까운 사육 방식이 대안으로 거론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주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방목 문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해답’으로 떠오르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제주 방목 한우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다. 이는 새로운 브랜드를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브랜드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역사, 산업 이전에 이어져 온 방식, 그리고 시장 이전에 축적된 시간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제주 방목 한우는 갑자기 만들어진 상품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 온 결과다.

제주의 들판은 오늘도 바람에 흔들리며 풀을 키우다. 그 풀을 먹고 자란 한우는 여전히 천천히 걷고, 천천히 자라다. 이 느림은 결핍이 아니라 선택이다. 이 책은 그 선택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지금 다시 의미를 갖는지를 차분히 따라가고자 하다. 제주 한우가 왜 주변부의 고기였는지를 묻는 일은,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중심으로 삼아왔는지를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제주의 풀은 기억하고 있다. 산업이 바뀌어도, 시장의 기준이 달라져도, 이 섬의 들판에서 이어져 온 방목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프롤로그는 그 기억을 불러내는 첫 문장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기억 위에 다시 제주 방목 한우의 이야기를 올려놓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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