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집 사장님들이 알아야 할 우리나라 돼지와 돼지고기의 역사
축산경영연구소 식육마케터 김태경 Ph.D
돼지는 채비동물, 청소 동물이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멧돼지가 살았지만 그 멧돼지가 잡혀서 가축화되지 못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중국 만주지방을 거쳐 한반도로 유입되어 기원전 2000년~3000년전부터 기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의 재래종 돼지는 한반도의 기후와 풍토에 잘 적응되어 체질이 강하고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였으나, 체구가 작고 배가 아래로 처지고 전구의 발달이 불량하고 복당 산자수도 적으며 성장률과 도체율도 낮았다. 한마디로 고기를 얻기 위해서 이런 재래종 돼지를 왜? 키웠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할 만큼 고기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는 것이 재래종 돼지였다. 일년을 키워도 30kg 이 안되는 소형만숙종이었다.
이런 재래종은 고기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키웠다기 보다는 채비와 청소 동물로 농가에서 부녀자들이 키웠다. 농업 부산물들을 먹여 비료를 생산하는 것이 사육의 주목적이었다.
우리의 재래돼지는 다 똥돼지였는지도 모른다.
유명 인류학자인 마빈해리스는 그의 책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돼지는 사람들이 먹는 곡물을 먹여서 키워야 하기 때문에 돼지를 사육과 먹는 것을 기피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돼지를 키우는 걸 보면 사람도 먹을 것이 없던 시절 곡물을 먹이기 보다는 그냥 방목을 하거나 인분이 가장 영양가 좋은 먹이 였다. 아마도 이렇게 사육된 돼지보다는 멧돼지고기가 더 맛있어서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멧돼지를 잡아 먹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을지 모른다.
역사는 가난한 민중과 여인에 대해서 인색하다.
역사는 가난한 민중과 여인에 대해서 인색하다.
우리 역사속에서 돼지고기를 어떻게 먹어 왔는지 세세한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시대 한양에 소고기를 도축 유통하는 현방은 24개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돼지고기를 전문적으로 도축 유통하던 저육전는 조선중기에는 3개소 밖에 없었다는 걸 보아서는 돼지고기는 민중들이 마을 잔치때 추렴으로 나누어 먹는 자급자족의 의미가 더 컸다. 조선말기 저육전이 한양에 80군데나 생겨 얼음의 수요가 늘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서 조선후기부터 주막의 술안주로 돼지고기 소비가 제법 이루어 진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쇠고기의 수요가 늘어 공급이 부족해서 대체재로의 역할이 컸다. 조선시대까지 아니 1970년대까지 돼지고기는 지금과는 달리 냄새가 무진장 나는 고기였다. 돼지의 냄새는 사료와 수퇘지의 웅취가 주 원인인데 잔반과 인분을 먹는 돼지, 거세를 하지 않았던 숫퇘지고기의 역겨운 냄새는 지금처럼 구워서 소금만 쳐서 먹는 로스구이방식으로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고기였고 각종 향신료 된장이나 생강등을 넣어서 삶아야 겨우 냄새를 좀 잡을 수 있었다. 아직도 정육점에 암퇘지라고 pop들이 붙여 있는 건 그나만 암퇘지는 웅취가 나지 않아 냄새가 없는 돼지였던 기억의 잔재다.
사실 암퇘지보다 거세한 돼지가 더 맛있다.
농무목축시험장 우리나라 근대 양돈의 시작
네이버나 논문등에 우리나라에 최초 서양종 돼지가 수입된 건 1903년 일본에 의해 요크셔종이 1905년 버크셔 종이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이건 1944년 일제가 출판한 조선농업발달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해방이후 계속 이렇게 가르쳤다. 식민사관에 의한 왜곡된 역사다. 우리땅 한반도에 서양종 돼지가 처음 들어 온 건 고종이 1884년 농무목축시험장이라는 농업 연구소를 건립하고 1885년 미국에서 돼지 8마리를 수입한 것이 최초다. 이 돼지들은 1902년까지 아주 잘 자랐는데 1902년 하루아침에 전염병으로 몰살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일본에 의해서 독살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이런 농무목축시험장의 역사는 1960년대 후반에서야 역사학회에 보고 되고 이야기되었으나 아직도 1903년에 일본에 의해서 서양종이 보급되었다고 우리 근대 축산 역시 일본제국주의자들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식민사관이 남아 있는 것이다.
고기는 정치다.
일제는 강점한 조선에서 쌀과 조선우(지금의 한우는 당시는 조선우였다 한우를 지금처럼 한우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1958년경이였다.)를 수탈해 가기 위해 혈안되어 있었다.
고기는 정치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고기로는 생산성이 낮아 가치가 별로 없었던 조선의 재래돼지를 개량하는 것이 일제의 숙제였다. 처음에는 산자수가 좋은 요크셔를 보급하고자 시도를 했지만 한번도 흰색돼지를 본 적이 없는 우리 농민들의 강한 저항을 받는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1920년대 버큐셔를 보급 우리의 재래 돼지와 누진교배를 통한 개량 사업을 시작한다. 성과가 좋았다. 해방이전 마지막 통계가 기록된 1942년 조선 반도의 돼지중 70%가 재래종과 버크셔의 잡종이었다. 이 돼지는 다 크면 60kg 이상의 몸무게를 가졌으니 고기 생산량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우는 150만두가 일본으로 강제로 이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축산통계 자료는 매우 정확하다. 수탈을 위한 자료를 작성해야 했으니 조선 총독부 관료들이 무진장 노력했던 것 같다. 문제는 소의 도축 두수는 정부가 철저히 통제해서 지정된 도축장에서 도축을 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어 거의 정확히 알 수 있지만 돼지의 경우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을에서 추렴등으로 자가 도축을 하고 나누어 먹었기에 도축된 돼지수가 매우 적었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에 돼지고기를 얼마나 먹었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1922년 9월 16일 동아 일보 기사를 보면 경성 지금의 서울 사람들이 일년에 쇠고기를 14.25kg 돼지고기를 7.125kg 먹었다는 기사가 있다. 지금도 쇠고기를 1인당 11kg 정도 밖에 못 먹는데 1921년 당시에 14kg이나 먹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지만 동아일보 기사니 인용해 본다. 이 기사를 보면 정말 일제는 경성부민들 우민화(愚民化)하기 위해 고기를 선심을 사는 우민화(牛民化)정책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돼지고기는 이북사람들이 좋아 했다.
1909년 도별 돼지 사육 두수 자료를 인구 천명당으로 나누어 보면 한수 이북지역이 한수 이남 지역보다 인구 천명당 돼지를 두배 더 키웠다. 이는 한수 이북 사람들이 한수 이남 사람들보다 돼지고기를 두배 더 먹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전국민이 다 좋아 하는 돼지고기이지만 아마도 해방이전 아니 6.25이전 까지 우리 음식은 지방색이 강했고 돼지고기를 주로 소비하던 지역은 한수이북이었다. 가만히 지금 유명한 돼지고기 요리들을 보면 다 이북 사람들이 피난와서 먹고 살자고 시작했던 식당 음식들이다. 부산의 돼지국밥도 피난민 음식이고 장충동 족발도 신의주 순대국도 다 이북음식이다.
각도 돼지 분포도
1920년대 작성된 각도의 돼지 분포도를 보아도 한수 이북에 돼지들이 더 많았던 걸 알 수 있다. 이 각도 돼지분포도에서는 지례돈, 강화돈, 평북돈, 사천돈등 지금까지도 명성이 남아 있는 재료 돼지들의 산지가 그 당시에도 돼지 사육 두수가 많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역시 제주돼지이야기를 잠깐 한다면 당시 제주도는 호수만큼 돼지를 사육했다. 앞에서 일제 강점기에 70% 재래돼지가 버크셔의 교잡종이 되었다고 이야기했는데 제주도 돼지는 일제 강점기 동안 버크셔랑 교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재래돼지 그대로 사육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제주 흑돼지들의 유전자를 검사해 보면 육지의 흑돼지들과는 달리 버크셔피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