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돈육 수출의 역사 9

4.3 1970년대 초 양돈전문가의 수출에 대한 제언

4.3 1970년대 초 양돈전문가의 수출에 대한 제언

아래의 글은 주식회사 양돈가공센터 강익진 대표이사가 1972년 12월에 농어촌개발이라는 책에 기고한 돈육 대일 수출 전망과 그 개발 대책 중 당시 전문가의 대일 수출 활성화를 위한 제언을 옮겨 본다.


4.3.1수출창구의 일원화와 생산체계 확립

대외공신력의 증대와 국내 업자 간 출혈 경쟁을 지양하기 위하여 수출창구를 일원화할 필요성이 있다. 이는 중공과 경쟁하여 나가는 면에서도 중요하다고 본다. 이 창구는 가공업자와 생산자에까지 자금 공급 및 원자재 공급을 융자 알선할 수 있는 대외적 공신력이 있는 정부 대행기관이었으면 한다. 이런 의미에서 농어촌개발공사 같은 기관이 유망한 후보자가 될 수 있겠다. 또 농어촌개발공사는 한국냉장주식회사의 거대한 냉동 냉장 시설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의 수임을 다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가공업자는 자체 생산단지나 계약 생산 등의 자체 생산기반을 가져야겠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는 한 지속적 수출은 거의 가망이 없으므로 정부 및 일원화수출창구는 가공업자가 자체 생산이 가능하도록 지원을 하던지 가망이 없는 업체는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이로 인한 국내 돈가의 변동하여도 일정한 가격으로 수출할 수 있도록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여야 할 것이다.

가공업자는 계약농에 대하여 사료공급을 원가로 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야 하며 자금 공급도 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수출창구의 지원을 받는다. 또 수출창구는 종돈장을 가지고 항상 품종개량을 하여 나아가며 이를 각 가공업체를 통하여 생산자에게 공급한다. 또 수출창구는 각 가공업체에 대하여 가공기술을 지도하고 각 가공업체는 생산 기술지도원을 두어 계약 농가의 양돈기술지도를 하여야 한 것이다.


4.3.2 국내 수요증대책

안정된 수출 기반은 상당한 국내수요를 기반으로 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국민소득증대에 따라 육류의 소비량은 현저히 증가할 것으로 보나 현재까지의 추세를 보면 소고기의 수요만큼 돼지고기의 수요가 증대되지 않는 듯하다. 단위 중량당 영양 가치는 돼지고기가 높고 값도 현저하게(1/2 이하) 싼데도 돈육의 수요가 증대되지 않는 것은 연시 기호성 때문이라고 보고 있으나, 일본이나 서구에서 돈육의 수요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돈육의 요리방법이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어 돈육을 다양하게 조미 가공하여 먹는 기법이 뒤처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돈육의 판매방법이라 하겠다. 우리는 현재 아무 등급없이 비계와 가죽까지를 포함하여 판매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으나 일본에서만도 비계는 제거하여 돈지공장으로 보내고 정육을 등급별로 즉 등심은 등심대로 안심은 안심대로 각각 다른 단가로 판매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정육점에 가면 먹기 싫은 비계를 거의 절반이나 끼워주는 것이 싫어서 돈육을 안 산다는 사람들도 있는 형편이라서 우리가 당장 돈육판매에 있어서 등급제를 시행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비계만은 제거하고 팔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하여야겠다. 이렇게 된 경우에는 우육보다는 돈육 수요가 증대될 것으로 추측된다.

국가 경제적으로 생각할 때 소는 새끼를 한 마리밖에 낳지 않고 1년 반을 키워야 고기로 쓸 수 있지만, 돼지는 한 번에 열 마리 이상의 새끼를 낳고 반년이면 고기로 사용할 수 있는 점과 돼지는 좁은 면적에서 농후사료로 사육이 가능하고 소는 그렇지 못한 점을 생각할 때 돈육의 수요증대는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점이 크므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어야 하리라 본다.


4.3.3 원가 절감책의 보급

앞에서 서술한 생산자를 위한 사료 자금의 공급이 원활히 된다고 가정하더라도 돈육생산의 원가를 절감할 방법은 아직도 허다하다고 본다. 우선 몇 가지 대표적인 것을 만들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가.방목양돈

일본에서 성행한 방목양돈은 원가 절감 상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방목양돈은 일정한 경사진 면적에 울타리만 치고 경사 상부에 잠자리를 만들어 주고 하부에 사료통을 만들어 주는 극히 시설비가 안 들어가는 양돈 방법으로서 면적만 어느 정도 여유 있게 잡아두면(번식돈의 경우 한 마리당 10평 정도) 분뇨를 청소해 낼 필요는 없어서 인건비 및 관리비가 절감되고 돼지에 건강에도 좋은 아주 우량한 방법이라 하겠다. 시설비가 비교적 많이 들고 이로 인하여 금리와 감가상각 부담이 과중해지는 양돈업의 특수성과 또 한국경제의 실정을 고려할 때 이 방법은 국가적으로 권장되어야 할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특히나 야산개발의 절실한 필요성을 고려할 때 목초지의 개발이 어려워 낙농에 활용될 수 없는 야산도 양돈방목에는 이용될 수 있으므로 유리한 야산 개발책이 될 수 있겠다.

현재 일본에서는 주로 번식돈을 중심으로 방목을 활용하고 있으나 자돈 및 비육돈의 경우에는 잠자리의 난방 등의 시설을 가미하면 충분히 활용 가능하므로 이점 연구의 여지가 많다고 하겠다. 실제로 당 양돈가공센터에서 1천여 평의 방목장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는데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으므로 뜻있는 분의 견학을 권하고 싶다.


나. 국산 사료 자원의 개발

양돈은 굳이 배합사료로서만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농산물부산물의 엔시레이지라던가 저렴한 쌀겨 사료의 발효 등의 방법으로 저렴한 사료 자원을 개발할 여지는 많다고 본다.


다.시설의 과학화 및 활용도 제고

자금회전이 느린 양돈업은 시설비를 많이 투자할 수 없는 업종이기는 하나같은 시설비를 가지고도 양돈 기술상의 원리원칙에 맞는 돈사 구조를 존중하여 시설함으로써 돼지의 건강, 정상발육, 작업관리 면의 절약 등으로 얻어지는 이익은 실로 크다 하겠다. 또 단위면적당 1두라도 더 사육할 수 있게 설계하면 그만큼 생산원가는 절감될 것이다.


4.3.4 수입선을 위한 제반 편의 제공

우리가 중공(중국)과 경쟁하여 나가는 데는 우리의 지리적 유리성을 백분 활용하는 방법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된다. 수입선으로 하여금 매력을 느낄 만큼의 제반 편의를 정책적으로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 측의 냉장차 냉장 컨테이너의 한국 상륙은 일견 국가적 손실로 간주 되겠지만 대를 위하여는 소를 희생할 수 있는 신축성이 필요하다고 보며 또 상호협약에 의거 한국 냉장차나 냉장 컨테이너의 일본 상륙허가를 전제로 이를 승인할 가능성이 보인다. 또 정보의 수출가격 통제는 수출상사가 난립한 상태에서는 불가피한 조치라고 생각되나 이러한 까다로운 제약이 바이어를 몰아낸다는 것을 상기하고 재고가 있었으면 한다. 또 검역 방역 등을 철저히 이행하여 수입선에게 신망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 언젠가 일본에 수입된 우리나라 돼지가 돈콜레라가 발생하는 사건 등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아직은 돈육 수출상사에 대한 구상무역권을 인정치 않고 있었으나 중공과 가격경쟁이 치열해 지면 이 정도의 특혜는 베풀어 주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4.3.5 수출 시장의 다변화

돈육 수출은 현실적으로 일본이 개발거점이 되겠지만 수출시장은 항상 다원화할 필요가 있으므로 보다 널리 시장을 구하는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필자로서 구미제국의 양돈사정에는 아직 어두우나 우리가 돈육생산을 국제시세보다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는 한 수출 시장의 발견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상과 같이 ㈜양돈가공쎈타의 강익진 대표 제언에서 지금과는 많이 다른 그 시절 우리나라 양돈산업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 글이 쓰여진 1972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돈육 대일 수출을 계기로 양돈붐이 일고 있었다.

1968년 4월 12일 농어촌개발 공사는 광성기업 주식회사와 양돈 단지 조성을 위한 양돈 단지회사(합자회사) 설립협정서에 서명했다. 당시 농어촌개발 공사 차균희 사장과 박연서 광성기업회 사장 간에 조인된 합자회사는 연간 1만두의 비육돈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산 1-2에 50~100호의 단지 농가를 대상으로 조성했다. 투자는 광성기업 49% 농어촌개발공사 51%의 합작회사였다. 대지 1만 5천 평에 건평 1천 9백50평으로 연간 매출 1억 5천 8백만원을 계획하고 1968년 11월 28일 준공하게 되었다(그림 1-4). 시설자금 8천3백만원, 운영자금 4천8백만원을 투입 비육돈사 8동 (1,650평), 단지 세트 농가의 돈사 1,460평을 건립 모돈 732두를 사육했다. 양돈가공 센터는 제1단계로 비육돈을 연간 1만두씩 생산할 계획이며 2단계로 뉴질랜드와 합작투자로 시설자금 2억 1천만원을 투입 햄 소시지, 베이컨 등을 연간 약 6000톤 제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림1-4.png

양돈 센터의 효과는 세트(지금의 계열화) 농가 호당 연간 순익 28만원, 센터 고용 12,000명(연간)에 농가 취업 연간 3만 6천명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1970년 1월 12일 경향신문 기사에 의하면, 적자를 보고 있었다.

1970년대 들어 자가 생산에 의한 대일 냉동 돈육 수출을 1970년 6월부터 계획하면서 3개의 규격돈 생산단지를 조성하고 연내에 1만 7천 두를 생산 광성기업의 도축시설을 이용하여 냉동 처리한 다음 농어촌개발공사를 통해 수출할 것을 계획했다. 그런데도 적자가 계속되어 1970년에 검찰 수사도 받고 축협으로 이관도 계획했지만 일단 계속 공사의 자회사로 운영하기로 했다. 1971년에는 사단법인 축산물생산 수출 사업회 설립에도 참여하게 된다. 당시 이 사단법인에 참여한 대형 농장과 육가공처리업자는 다음과 같았다. 전북축산, 제주축산, 양돈가공센터, 한미농산, 농협, 축산협조, 신일물산, 제주이시돌농산협회 등이었다.

1972년 당시는 농어촌 개발공사가 투자한 금액이 전체 투자비 90%인 구천이백만원이었다. 1972년 초 농어촌개발공사는 투자회사 중 개기 불능상태에 빠진 6개 자회사를 공매처분 계획을 확정했는데 양돈가공센터도 포함되었다(표 1-13). 1972년 12월 26일 실시한 공매입찰 양돈가공센터는 9천 40만원으로 유복수(31. 경기도 인천시)에게 낙찰되었다. 유복수는 1980년 12월 양돈가공센터 대표로 국민당 창당발기인 명단에 있는 것으로 보아 1980년대에도 양돈가공센터는 운영되었던 것으로 같다. 인천의 양돈가공 센터는 국내에서 제주도 이시돌 목장을 제외하면 거의 최초의 기업 양돈장이였다.


표1-13.png
그림1-5.png

# 강익진:1967년 서울농대졸, 뉴질랜드 매시대식품가공학대학 대학원수료, 양돈가공센터 대표이사를 거쳐 1973년 4월 동양제과 생산 담당 상무이사로 이직함

강익진, “돈육 대일 수출 전망과 그 개발 대책 농어촌개발”, 1972.12.

매거진의 이전글대한민국 돈육 수출의 역사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