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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똘 Jun 20. 2022

쉼표,

순천/여수 혼여 (6/3일~6일)

원래는 거제에서 길게 조용히 머물고 싶었지만,

황금연휴 동안 내가 원하는 숙소들은 모두 마감되어 있었고,

어디를 갈까 지도를 이리저리 보다가 순천, 여수를 골랐다.


원래 가고 싶었다거나 뭘 보고 싶다거나 하는 건 없었고,

그냥 멀리 가고 싶었다.

앞으로 이렇게 길게 휴가를 갈 수 있을 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최대한 서울로부터 멀리멀리 있는 곳을 골랐다.


근데 막상 도착해보고 나니, 생각보다 멀지도 않았다. KTX타니 금방 오는 것...

누구는 해외도 훌쩍 잘 다녀오는데, 나 되게 이동반경 좁네 싶고..

좀 부지런히, 많이 돌아다닐 걸 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행의 시작은 계획부터라던데,

정말 시작하기 전이 더 설레고 더 좋았다.

배낭 가득히 짐을 넣어서 무거운데도, 등에 든든히 메고서는 기차를 기다리는 기분이 참 좋았다.

기차를 타고 서울과 점점 멀어질 때는 더 좋았다.

뭔가 해방되는 기분ㅋㅋ


KTX 타고 슝슝 순천역 도착

사실, 순천의 첫인상은 그닥 좋지 않았다.

순천역 자체는 크고 깨끗했지만, 역 근처의 상권과 환경은 조금 낙후된 느낌이었다.

지방도시의 역 앞은 다 비슷비슷한 것인지, 본가 쪽 역 앞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가게 안이 보이지 않는 유흥시설들과 오래된 가게들.. 그 골목 사이에 있는 내 숙소...(No...)


구하기 어려운 기간에 그나마 맘에 드는 곳을 잘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방은 생각보다 좁고 매트리스 상태도 좋지 않았다.

다른 건 정말 모조리 다 좋았는데, 이 매트리스에서 3박을...?

여행길에 오르며 설렜던 마음은 부풀었던 만큼 크게 터졌다.

(그렇게 첫날 새벽은 3가지 숙박 앱을 돌아다니며 새 숙소를 구하느라 시간을 다 썼다. 시간뿐만 아니라 돈 까지~~!)


이 터진 마음을 봉합하기 위해 최대한 맛있는 걸 먹였다.

순천에서 유명하다는 일식집에서 한우 등심 샐러드와 모둠꼬치, 하이볼까지 든든히 먹임..

그치만 이 저녁식사마저 사실 평범했다... 기대가 커서 실망이 컸던 건지...

순천 오기 바로 전에 먹었던 서울의 소고기 집이 너무 비범했던 건지...


이래저래 축 처진 마음을 달래준 건, 순천만 정원로 산책이었다.

넓게 펼쳐진 고요한 공원 산책로가 되게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별 거로 다가왔다.

한쪽만 꽂고 있던 이어폰에서 나오던 브금도, 단정하게 펼쳐진 공원 풍경도,

보드 연습하고 있던 사람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 그 모든 게 한 데 섞인 풍경이 평화로왔다.


여행 첫날 위로가 되었던 산책로


이번 혼자 여행은 유독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는데,

어디까지 내 뜻대로 안 되나 보자 싶을 정도로ㅋㅋㅋ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여행길이었다.


매트리스가 불편한 숙소

생각보다 별로인 식사

꿀꿀한 날씨 (마지막 날은 비가 왕창 내렸다)

열심히 찾아갔지만 혼자여서 뷰가 보이는 자리에 앉지 못했던 카페

인터넷에 나온 영업시간과 달라 틀어진 동선과 계획

파란불 신호가 4번째 돌아올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꽉 막힌 교통



근데 참 다행히도(웃기게도), 나의 해방 일지에서 나왔던 대사처럼 몇 초씩 설레는 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에 '아 이거 보러 왔네'라고 생각하기도, '이게 뭐라고 기분이 좋냐'라고 생각하기도, '오길 잘했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고요한 산책로

기대보다 더 좋았던 식사

급하게 샀는데 찰떡같이 맘에 든 원피스와 양산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선선한 바람

기다림 끝에 본 풍요로운 순천만

안 가져왔으면 어쩌나 싶었던, 여행 친구가 되어 준 책 한 권

주인장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커피와 디저트


'인생은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의 복선을 모두 합쳐 놓은 여행인가 싶다가도,

단번에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버리는 별 거 아닌 듯 별 거 인 순간들이 곳곳에 있었다.




아래는 감사하게도 별 거 인 순간들을 만들어줬던 곳들이다.

시간순 나열, 1~4는 순천, 이후는 여수

식당들은 다 재방문의사 100%다.


1. 순천만 정원로

순천 국제정원 앞쪽에 있는 공원 같은 곳인데, 카카오맵에는 따로 공원으로 표기되어있지 않다. 모징..?

도로명으로 검색해서 찾아가면 갈 수 있을 듯.. 조용히 산책하기 좋다. 그리고 가보진 않았지만 근처에 야시장도 있다.


2. 아마씨 아름엄마 씨앗밥상

반찬 하나하나까지 취저

공간이 주는 분위기도, 음식 맛도 너무 좋았던 곳.

11시 30분 오픈인데, 11시 15분쯤부터 사람들이 웨이팅 하고 있었다.

다행히 일찍 가서 오픈 시간 맞춰 들어가, 연잎밥과 토마토바질에이드를 먹었다.

토마토바질에이드는 블러드메리라는 칵테일과 맛이 비슷할까 봐 걱정했지만

걱정과 달리 달달하고 향도 좋고 넘 맛있었다.

그리고 주인분이 굉장히 친절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혼여의 성공적인 오전 시간은 아마씨가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었다.


3. 순천만 습지

순천만 국제정원은 개인적으로 별로였다. 근데 습지는 가길 잘했다는 생각.

국제정원 안에서 화살표 따라 스카이큐브(습지까지 이동수단 1) 타러 가고,

스카이큐브에서 내려서 갈대열차(습지까지 이동수단 2) 줄 서서 기다릴 때만 해도 그냥 가지 말까 몇 번을 고민했다.

살짝 더운 날씨와 가족단위로 온 북적북적한 사람들, 쪼리 사이로 들어오는 모래...

아 그냥 갈대면 보러 갈 필요가 있나... 그냥 갈대아냐..?? 그냥 갈대 아니냐고~~? 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탈주하기 전에 갈대열차가 금방 와서 일단 타고 갔다.


근데 갈대열차 탄 순간부터 바람과 풍경에 이미 기분 좋아짐.

그리고 도착해서는 습지의 풍요로움에 반해버렸다.

날씨가 더 좋았다면 완벽했겠지만, 조금 흐린 날씨임에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그냥 갈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으로 다가왔다.


4. 오트르망

생선 안좋아하는데도 맛있다

혼자 여행 다닐 때는 더 잘 먹야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코스요리 먹으러 갔다.

프랑스 레스토랑은 처음 가봤는데, 음식과 와인이 너무 맛있었다.

제일 처음에 나오는 아뮤즈 부쉬부터 마지막 디저트까지 입이 너무 즐거웠다.

특히 나는 해산물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도, 아뮤즈부쉬로 나왔던 잿방어 그리고 농어스테이크를 먹는데 생선 특유의 풍미가 너무 좋았음.

뜻대로 되지 않는 혼여의 성공적인 저녁시간!


5. 무수희

삼치감태롤 개꿀맛.. 나는 생선을 안 좋아 하는 게 아니라 맛없는 생선을 안 좋아하는 거였던 것..! 삼치 그냥 입에서 녹는다…

여기도 오픈 5분~10분 전에 가야 앉을 수 있다.


6. 카페 비미

오션뷰 자리에는 앉을 수 없었지만, 커피와 디저트가 내가 그동안 먹었던 것 중 세 손가락엔 드는 것 같다.

커피와 디저트가 나오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걸리는데, (많이 걸리는  아니고 보통 카페에서 나오는 시간보다 조금 길어서 갸웃했음)  시간이 주인장의 장인정신녹여내는 시간 아닌가 싶은 정도로 맛이 너무 좋았다.


7. 여수랑

솔직히 무리수였음…

공간은 아니고, 여수 공공자전거. 서울 따릉이와 비슷한 서비스다.

비가 왔지만 우비 쓰고 자전거로 돌아댕겼다. 택시가 잘 안 잡히기도 하고, 차가 엄청 밀렸던지라

급하게 어플 깔고 사용했는데 나름 잘 이용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엔 그냥... 여행 동선을 수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비를 썼지만 바지가 왕창 다 젖어서, 기차역에서 아주머니들의 걱정 어린 질문(춥지 않냐 등등)을 받을 수 있었다.



6월 초에 다녀온 여행일지 부랴부랴 쓰기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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