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의 작업 이야기

못주머니 속 스케치북 - 나무향기 편.

by 상진



"형님, 여기요!"

내가 소리치며 손을 흔들자,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온다.


"오는데 고생했다. 오래 걸렸냐?"

"아뇨. 한 시간 반쯤?"


내가 사는 연남동에서 한 시간 반쯤 버스를 타고 도착한 용인 문예회관 앞에서 그를 만났다.

시크한 듯 말을 건네지만 얼굴에는 나를 반겨주는 미소가 가득한 남자.

최근 나처럼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림이 좋아서 드로잉 작가로 전업한 곽석경 작가이다.


그동안 그린 드로잉 작품들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여러 이웃이 생겼는데, 이웃 중 대부분이 재미나고 놀라운 그림들을 그리는 그림쟁이들이다. 그런 그림쟁이들이 운영하는 블로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곳이 '못 주머니 속 스케치북'였다.

펜 드로잉을 기반으로 수채화와 여러 표현기법들을 알기 쉽고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이 블로그의 주인은 나무향기라 불리는 곽석경 작가의 놀이터이다.



20160323_163523.jpg <못 주머니 속 스케치북 블로그>



서로의 그림에 이런저런 댓글들을 달다 보니 이런 그림들을 그리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 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는데, 때 마침 리모 작가의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출간 기념 전시회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첫인상의 그는 영락없는 교수 스타일에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뿜어냈고 그런 모습이 그를 더욱 작가답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1년여간 작가그룹과 드로잉 모임 그리고 여러 행사까지 함께 할 줄은 그때는 생각이나 했을까.


"드디어 형님 작업실을 직접 구경해보네요. 하하.."

"뭐, 볼 건 별로 없어."

"에이, 그림쟁이 작업실에 그림과 도구만 있으면 볼거리는 충분하죠"




나무향기작업실_작은.jpg <나무향기 작업대>



아파트 현관문을 지나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업실의 벽은 온통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작업대에는 각종 그림 그리는 도구들로 넘쳐났다.

페이스북이나 잡지에서 보던 외국작가들의 작업물들이 잔뜩 쌓인 작업실. 딱 그런 모습이다.


"많이 지저분하지? 정리를 좀 해야 하는데 좁아서.. 곧 작업실 옮기려고"

"지저분하긴요. 작업하는 사람들 작업실이 다 그렇죠. 오히려 뭔가 작업실다워 보이고 더 멋진데요."


작업대에는 지금 진행 중인 그림이 걸려있었고, 벽과 책상에는 그동안 그려놓은 그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작업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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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많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했을까.



그의 그림들을 보면서 그가 그림에 대해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하나하나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작업하는지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으로서 알 수 있었다.

한 점 한 점에서는 그의 열정이 묻어났고 그 열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자극과 존경심을 가지게 했다.


"와, 정말 너무 멋지네요. 대체 이건 언제 다 이렇게 그리신 거예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린 것도 있고.. 일 다녀와서 밤이나 새벽에 그렸지 뭐."


나는 최근 여러 곳에서 드로잉 강의를 하면서 드로잉의 일상화를 곧잘 이야기하곤 하는데, 내가 이야기하는 드로잉의 생활화를 누구보다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작가가 바로 나무향기, 곽석경 작가이다.


드로잉이 일상생활에 접목이 되면 그저 무심코 지나쳐가는 순간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초고속 시대에 살면서 많은 것들을 느낄 새도 없이 지나쳐 버리는데, 드로잉은 이러한 것들을 다시 상기시켜주고 일상을 재미있고 행복한 삶으로 만들어준다.



거기에서 얻어지는 성취감과 행복감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여러 드로잉 수업과 강의들을 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일상 예술가가 바로 나무향기 그 자체였다.



나무향기작업실2_작은.jpg <그림그리는 나무향기>




"그런데 형님은 어떻게 전업을 결심하신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예술가로 사는 거 정말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오랫동안 하시던 일을 그만두고 화가로 전업하신 이유라도 있나요?"


"너와 같지 않겠냐? 하하..

인테리어와 목수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뭐, 내 나이도 50이 넘었으니 겪을만한 것은 대략 다 겪어본 셈이지. 이 나이에 성공이나 다른 것들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저 여행이나 하며 좋아하는 그림이나 실컷 그리고 살았으면 좋겠다."


허허 웃으며 여행이나 하며 그림이나 그리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큰 공감을 했다.

아마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고 싶어 하겠지. 그렇지만 하고 싶다고 누구나 다 할 수는 없는 이유는 현실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환경적으로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국내에서 화가로 살아가는 길은 아직도 너무나 어렵기만 하다. 예술활동을 하며 경제력까지 갖출 수 있는 예술가는 많지 않은데다가 그들을 지원해주는 사회 시스템도 열악하기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는 늘 예술가들에게 고달픈 현실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예술가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친구들을 무수하게 보아왔다. 그렇기에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예술가로 전업하는 일은 스스로 어려움 속에 몸을 던지는 것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그 힘든 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만한 가치를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은 어떻게 시작하신 거예요?"

"고등학교 때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미술부에 들어갔어. 매일 미술실에서 그림 그리면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 당시 미술부 규율이 세서 선배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림이 좋아서 계속 그렸지. 그때 어찌나 맞았는지 그만둘까도 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어. 대학 갈 때쯤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셔서 결국 그림을 접었지만.."


꼬르르륵..

아침부터 이곳저곳에 들리느라 밥시간을 놓쳤더니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점심 먹으러 가자."


우리는 대화를 잠시 멈추고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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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근처에 유명한 중국집이 있다고 해서 자리를 그리로 옮겨 음식을 주문하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까 아버지 반대로 그림을 그만두셨다고 했는데 그럼 어떻게 다시 그림을 시작하신 거예요?"

"그때 그림을 접고 안 그린지 20년도 더 됐는데, 어느 날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더라고 그래서 여기저기 블로그를 기웃댔지. 다들 개성 있고 너무 잘 그려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장희를('서울의 시간을 그리다'저자 이장희 작가) 만나게 되었지.

그림에 대해 고민이 있다니까 장희가 먼저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해서 이게 꿈인가 싶었어.

당시 나에게 장희는 존경하는 드로잉 작가였으니까. 그렇게 만나고 대화를 하면서 내게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


못 그린 그림은 없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 말을 듣고 용기를 내서 다시 그림을 시작할 수 있었지."


그림을 포기하려 하는 사람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작가가 먼저 연락을 해서 그림으로 고민하는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또 그 이야기를 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두 사람의 멋진 만남이 내게 아름다운 동화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도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대화를 하는 사이 테이블 위의 접시들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형님이 추구하는 작업방향이 있으신가요?"

"작업방향이라.. 그냥 나는 가방 하나메고 여행 다니면서 그림이나 실컷 그리고 싶어. 하하

지금은 내 그림을 완성시키고 만들어가는 시기인 것 같아. 좀 더 나다운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

그러고 나서 한 걸음씩 움직여야지."


다음 일정 때문에 서울로 돌아가야 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앞으로도 쭈욱 함께 그림 그릴 것이기에 다음을 기약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마음이 뭉클하고 많은 공감이 갔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의 시기는 나 자신 스스로에게 투자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내 것들을 하나하나 쌓아가야 하는 시간, 앞으로의 일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다.

언제나 곽석경 작가를 만나면 즐겁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자극이 되기도 한다. 함께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 것을 그와 같은 그림쟁이들을 만나면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무엇을 하던 항상 응원해주는 그처럼 나 역시도 나무향기 곽석경 작가의 예술활동에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