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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르따도 Jul 22. 2022

Ep7. 아는 게 힘, 모르는 게 약

그래도 알아야 면장을 하지 

내가 많이 산 건 아니지만 어느덧 사십을 넘어 중년을 향해 가다보니, 세상에는 아는게 힘인 것보다 모르는 게 약인 게 많은 것 같다. 아,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하는 것 보다 몰랐으면 차라리 편했을 걸 하는 게 더 많은 마음이랄까. 


그래서, 이직을 하고 나서는 굳이 사람들과 어울리려 술자리를 찾지 않았다. 회사 술자리에서 하는 말들은 대부분 회사에 대한 안좋은 얘기거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뒷담화이다. 생산적인게 하나도 없고, 알아서 좋을 내용도 하나 없다. 거기서 나온 대화들이 다음날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가십거리가 되어 소문은 확대되고 과장되기 마련이다. '아 새로 온 그 사람, 우리 임원하고 동향이래, 아 학교도 같대, 낙하산이네.' 뭐 이런 식. 예전에는 나도 그런 자리에 합류하여 같이 누군가를 씹어대는 걸 즐겼으나, 나이가 드니 다 피곤한 일, 다 의미없는 일. 차라리 그 시간에 우리 딸래미 동화책이나 한 권 더 읽어주는게 백오천배 더 낫다.   


내가 참석을 잘 안하니까 나에 대한 뒷담화도 꽤 될 꺼라 추측한다. 실제로 '새로 온 그 사람, 낙하산이래' 라는 말을 세 다리 건너 다시 내 귀에 들려오기도 했으니까. 원래 나는 관종끼가 또 다분하니까, 없는 자리에서도 존재감이 드러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만다. 


아내가 내게 자주 하는 말이, '오지출신이 취향만 고급이다.' 라는 거. 

오지출신으로 말하는데, (의식의 흐름 전개)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자전거를 타다 엄지발톱이 부러진 일이 있었다. 유일한 의료기관인 보건소에는, 군대 대신 복무하는 의사 청년이 있었는데, 내 발톱을 보더니 이렇게 두다가는 금방 곪아버리니까 뽑는 수 외엔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의사 양반말을 철썩 믿고 생발톱을 뽑기로 했다. 그 시술 방법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술을 하지 않겠다.  


나는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그게 그렇게까지 할 일이었나 싶다. 과잉진료이거나 오진이거나, 분명 둘 중 하나였을꺼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치료가 끝나고, 이 어려운 걸 울지 않고 견뎠다니, 기특하다면서 (돌팔이) 의사 형이 사과를  내게 하나 건넸다. 그 이후에도 이 치료(?), 수술(?)을 언급할 때, 내가 견딘 인내심에 대해서 어머니가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다. 


"아니, 얘가 생발톱을 뽑는데도 눈 하나 깜빡을 안해. 뭘 해도 할 애구마잉."


근데, 몇 달 후에 친구들과 놀다 채 아물지도 않은 발톱을 또 다치고 만다. 뛰어가다가 같은 곳을 돌덩이에 부딪힌 것이다. 이번에도 그 돌팔이 의사 냥반을 찾았다. 발톱에 덮힌 거즈를 열어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이렇게 두다가는 곪겠네. 또 치료를 해야겄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서 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따, 얼마전까지만 해도 눈 하나 깜짝안하는 독하디 독한 뭘 해도 할 얘였는디, 지금은 소인뱅이맹키로 별것도 아닌 일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겁쟁이가 되고 말았당께요. 


엄마가 내게 자주 하던 말버릇이 있다. 

'인생은 길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응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소리만 들을라고 노력해라잉. 아름다운 것만 보고 살기에도 인생이 짧은께는.'

  

인생은 길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은데 굳이 생발톱을 뽑을 이유가 없다. 그 경험은 하지 말아야 할 경험이다. 내가 오지 출신이 아니라 도시에서 번듯한 병원에, 번듯한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으면 그렇게까지 치료를 받아야 했나 싶다. 그니까 한 번의 고통은 한 번으로 족한 법이다. 아예 그런 고통이 애초에 없었으면 더 좋고. 이런 오진의 경험이 하나 더 있는데 짧게 기술하겠다. 


태권도장에서 대련하다 코를 맞아 코가 휘었는데, 80세가 다 되어 가는 의사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만, 내 손을 본인의 양손으로 감싸고는 기도해 주시면서 약만 지어 주셨다. 그 의원은 할머니로부터 의사 면허만 빌리고, 진료는 면허가 없는 아저씨가 보는 곳이었다. 당시 할머니가 기도해 주시면서 하는 말씀이, "니 주위에는 수호 천사님이 있어서 평생 너를 지켜주실 거야.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 빽으로 자신있게 살어" 였다. 사실, 그 말은 지금까지 내게 힘이 되곤 한다. 그렇지만 내 코가 휜 건 수호천사가 지켜주지 못했다.


여름방학때 광주에 있는 이비인후과에 가니까, 코가 휘었을 때는 2주가 지나기 전에 바로 잡아야 한단다. 아니면 연골이 굳어버려서 나중에 더 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호흡하는데 약간의 불편이 있었는데 그게 심해지자, 군 제대 후에 비중격만곡증이라는 수술을 받았다. 코가 휜 지 만 7년이 지난 후였다. 


(의식의 흐름으로 또 기술하자면)

내가 처음에 둘째를 임신했을 지도 모른다는 아내의 얘기를 듣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국민학교 3학년때 발톱을 빼던 기억이다. 불현듯이, 생각이 났다. 


첫째를 낳고 양가 도움없이 둘이서 딸아이를 아둥바둥 키웠던 기억이, 마치 저 기억과도 비슷했나 보다. 

계획없이 아이가 생겼으니,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컸던 게 사실이다. 아, 어떻게 또 아이를 키우냐, 하는 마음과, 언제 키워서 언제 장가/시집을 보내냐 하는 마음. 그리고 육아의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해 하는 마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정리가 되자 이제는 기대가 되는 마음이 더 크다. 

힘든 육아의 경험은 금방 잊혀지고, 아이가 어렸을 때 하는 예쁜 짓이 더 크게 기억에 남기 마련이니까.

결혼 전 가정의 완성은 넷이다, 가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는 4인이다,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발톱은 다시 자라고, 이제는 발톱이 부러져도 갈 수 있는 좋은 병원과 좋은 의료진이 있다. 


한 번 키운 경험이 있으니, 두 번째는 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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