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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아영 Apr 15. 2017

왜 여자들이 절반을 차지해야 하는가

“그 선배 애 낳고 변하더라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더니 애 낳더니 어쩔 수 없나봐.”


결혼을 안 했던 시절 여자 선배들을 저렇게 묘사하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애 낳으면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애 낳으면 일을 대충 한다”로 이어져 “애 낳은 여자들은 쓰면 안 돼”에서 “애를 낳을 수 있는 여자들은 쓰면 안 돼”까지 연결된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땐 '결혼을 하면 안 되겠구나'부터 '다 그런 건 아닐 거야',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에까지 생각이 연결되곤 했다.


애를 낳고 알게 됐다. 가사 노동과 육아를 여성에게 떠넘긴 사회에서 회사 생활을 버틴 것도 대단한 것이라는 걸. 그나마 아이를 대신 맡아줄 가족(친정엄마나 시엄마, 아니면 시터이모님)이 없는 여자 선배들은 이미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것을. 또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는 것도. 게다가 그 선배들이 아이를 낳았던 시절은 출산 휴가 2개월밖에 주지 않던 때였다. 2개월이라니 2개월이라니. 아직 뒤집지도 못하는 아기를 떼놓고 출근하게 했던, 야만의 시절이었다.


복직 후 여자 선배들은 내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다. “애가 어릴 땐 일을 살살해도 괜찮아. 오래 버티는 게 중요한 거야”에서부터 “힘들지. 지금 정말 힘들 때야.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져”, “근데 정말 힘드니까 둘째는 낳지 마”까지...


물론 나이가 열 살 이상 차이나는 선배들과 다른 생각을 가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선배들이 없었다면... 난 과연 이곳에 있었을까? 복직 후 그 생각을 많이 했다. '저 선배들 덕분에 내가 여기 있구나.' 표현한 적은 없지만. 그저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다녔다는 것이 고마웠다.


여기자가 없던 시절, 1/10이 여기자이던 시절, 그리고 2000년대 여기자가 많이(급속히?) 늘어나던 시절. 회사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끔 ‘바지 입은 여자’를 묘사하는 글을 읽는다. 직장 내 여자들이 늘어나도 그 여자들이 ‘바지 입은 여자’라 남자 상사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최근 페친의 추천으로 페이스북 COO인 셰릴 샌드버그의 <린 인>을 읽었다. 그 책에서 무릎을 치면서 웃었던 부분.


셰릴은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구글에서 일하고 있었다. 임신 3개월이면 끝난다는 입덧이 9개월 내내 계속됐고 어느 날 회의에 늦지 않으려고 겨우겨우 주차를 했는데 겨우 주차한 곳이 사무실과 멀어서 산처럼 부푼 배를 안고 겨우 회의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 근데 그날 밤 야후에서 일하던 남편이 이야기한다. 야후에는 각 건물 앞에 임산부 전용 주차 공간이 있다고. 셰릴은 다음날 구글의 설립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사무실로 쳐들어가 회사에 임산부 전용 주차 공간을 가능한 한 빨리 마련해달라고 건의했다. 세르게이는 그 문제를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곧 사과하고 바로 조치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셰릴은 말한다. “나 또한 내가 임신해서 발이 부어올라 쩔쩔맬 때까지 회사에 임산부 전용 주차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구글에서 최고참 여성 중역이었으니 당연히 생각했어야 할 문제 아닌가? 하지만 세르게이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다른 임산부 직원들은 배려해달라고 요청하지 못하고 묵묵히 불편함을 참았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감이 없거나 직위가 낮은 탓에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한 것이리라.”


이 부분을 읽으며 새삼 난 회사 화장실이 생각났다. 입사 초 편집국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보다 여자 화장실이 더 좁았다. 기자가 남자만 있던 시절 남자 화장실 밖에 없었는데 그 공간을 일부 쪼개 여자 화장실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2011년쯤 편집국 리모델링을 할 때 여자 화장실 크기가 더 넓어졌다. 여자 화장실에 대한 불만과 민원이 더해진 결과이리라.


여자가 늘어나면 뭐가 바뀌느냐고? ㅎㅎ 화장실이 생긴다. 웃기지만 편집국에 남기자만 있던 시절 처음 입사한 여자 기자는 어떻게 화장실을 다녔을까. 참 단순한 사실이지만 그 선배 덕분에 여자 화장실이 생겼을 것이고 또 여기자가 늘어나니 화장실도 커졌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간 임산부전용 주차장도 생기겠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남자 기자가 압도적으로 많던 시절(1대 99쯤 되려나) 편집국에서는 담배도 피웠다고 한다. 요즘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풍경이다.


첫째를 임신했던 때 회식을 하던 중이었다. 남자 선배와 남자 동기가 회식 자리에서 담배를 피웠다. 속으로 생각했다. ‘임신 중이라고 말할까. 말까. 말할까.’ 결국... 말하지 못했다. 그들은 내가 임신한지 몰랐을 뿐이었다. 그때는 괜히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기 싫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멍청했다. 그날 자리에서 나와 만만한 남자 동기에게만 말했다. “나 임신했어.” 쩔쩔매며 미안해하는 그를 보며 괜찮다고 했지만 이후 그 사건이 떠오를 때면 ‘왜 나는 그 자리에서 말하지 못했나’ 후회가 됐다. 이제 더 시간이 지나 회식 자리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에피소드 또 하나. 결혼 직후였다. 오랜만의 사내 커플이라 사람들의 장난스러운 시선도 꽤 있었다. 출근할 때였나 남편과 내가 한 엘리베이터에 탔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탄 한 선배가 내게 물었다. “밥은 해줬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이미 얼굴엔 기분 나쁘다는 표가 다 난 뒤였다. 다행히 편한 선배였고 되물었다. “제가 왜 밥을 해줘야되죠?” 당황한 선배의 표정. 결혼한지 만 5년이 지난 지금이었다면 이보다 세련되게 받았겠지만 그때는 정색하고 말았다. 정말 다행히도 선배는 웃으셨고 그 이후부터는 남편만 보면 장난스럽게 “밥은 해줬냐?”고 묻기 시작했다. 아마 처음에는 내 표정을 보고선 기분이 좋진 않았겠지만.


여자들이 늘어나 조직의 풍경을 얼마나 바꿨을까. 별 것 아니지만 남자에게 ‘밥은 해줬느냐’고 묻게 하는 것. 그게 시작이 아닐까. 셰릴은 <린 인>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제를 일으켜봤자 시끄러운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만 들을 터였다.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여성이 직장에서 겪는 불이익을 지적하는 것이 푸념하거나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행동으로 잘못 해석될까봐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일했다.


해가 지나면서 여성 친구들과 동료들이 하나둘씩 직장을 그만두기 시작했다. 스스로 선택해서 떠나는 여성도 있었고 융통성을 허용하지 않는 회사에 떠밀리거나, 집안일과 육아를 분담하지 않는 배우자의 요구로 낭패감에 휩싸여 떠나는 여성도 있었다. 직장에 남아 있더라도 주변의 대단한 기대를 충족시키겠다는 야망을 줄였다. 여성 리더가 출현하리라는 우리 세대의 희망도 점차 빛을 잃어갔다. 구글에서 근무한 지 몇 년이 지났을 무렵, 이러한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내가 성 문제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현재 상황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세계에 진입한 첫 세대 여성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지내며 자신을 조직에 맞춰야 했는지 모른다. 어떤 때는 그것이 가장 안전한 길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집단으로서의 여성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은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하고, 자신을 뒷걸음치게 만드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요즘 대선 후보 배우자들의 인터뷰를 지나가다 몇 번 봤다.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남편 이승배씨의 인터뷰는 정독했다. “심상정 남편? 한 마디로 ‘그게 뭐 어때서? 영광이지!’하는 생각”이라는 답변과 “제 처가 세상에 긍정적 기여를 하도록 옆에서 돕는 게, 저의 존재 이유의 핵심”이라는 답변은 정말 멋졌다. 그리고 통쾌했다. 여성 정치인과 내조하는 남편이 보여주는 평등한 결합. 게다가 그 남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슈퍼우먼 방지법’에 대한 설명이라니!


남녀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이 조직, 나아가 이 사회의 건강에 좋다. 그게 회사에도, 국회에도, 고위 공직자의 세계에도 여자들이 절반을 차지해야 하는 이유다. 선배들이 버틴 덕분에 나는 둘째까지 육아휴직 1년씩 2년을 썼다. 내 여자 후배들은 육아휴직 2년을 남편과 공평하게 나눠 쓰기를 바란다. 또 내 남자 후배들은 육아휴직 기간 직접 아이를 키우는 기쁨을 누리길 바란다.


<린 인>에서 이 문장들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 평등한 사회라면 여성이 국가와 기업의 반을 운영하고 남성이 가정의 반을 꾸려나가야 한다. 이것이 내가 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오는 아버지가 늘어나고 직장에서 일하느라 바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이 늘어날수록 아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더욱 많은 선택 사항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상은 여성에게 성을 근거로 기대하지 않고 개인적인 열정과 재능, 흥미를 기준으로 기대할 것이다.(...) 내 아들이 풀타임으로 자녀를 키우는 중요한 일을 하고 싶어 하더라도 그 뜻을 존중받고 도움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내 딸이 집 밖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기를 원하더라도 그 뜻을 존중받고 도움받을 뿐 아니라, 딸이 성취한 일들에 대해 타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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