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이 잠시 소강상태인 틈을 타서 짐을 싸긴 했지만 마음속으로 스멀거리는 불안감은 분명했다. 여행이 끝날 무렵, 정확히는 귀국 24시간 전에 현지 의료진에 의한 전문가용 신속 항원 검사(RAT)에서 양성이 나오면 홀로 거기에 남아 격리치료가 끝난 뒤 음성 판정을 받은 후에야 귀국이 가능한 일정임을 잘 알고 출국하는 길이었다.
용감한 자가 먼저 세상을 보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시국의 터널을 마냥 기다리기엔 갈 곳이 너무 많았다. 가능하다면 지구촌 곳곳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니까. 가족이 코로나 증세로 복용하다 남은 약을 진단 키트와 함께 가방에 챙겨 넣었다.
여러 가지 일정들이 겹쳐 여행 전날까지 바쁘게 움직이다가 휴식 없이 하루 전에 급히 가방을 꾸렸다. 요 근래 몇 년 동안 감기도 안 걸렸으니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보통 한 달가량의 배낭여행을 주로 다니다 2주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라 약간 방심한 것도 있다.
그렇게 여행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났다. 노르웨이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선상 관람을 하는 날이었다. 빙하기 말기 U자형 계곡에 머물던 빙하가 소멸되면서 바닷물이 유입되고 해면이 상승되어 피오르가 만들어졌다. 날은 더없이 맑고 물은 푸른데 바람이 많이 불었다. 그전에 달스니바 전망대에 갔을 때 생각보다 춥지 않아서 패딩 옷을 차에 두고 배를 탄 게 실수였다. 선실에 들어가서 앉아 있기엔 주변의 풍경이 너무 황홀했다. 유명한 7 자매 폭포와 맞은편 구혼자의 폭포에서 날아오르는 물줄기에 넋이 빠져 바람을 맞으며 갑판 이곳저곳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곡빙하의 바람을 너무 많이 맞았나? 다음 날 아침 목이 칼칼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눈앞에 왔다 갔다 한다. 진단 키트는 다행히 음성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여행은 계속되고 감기 증세는 더하다 말다 했다.
북구의 여름은 백야현상이 나타나서 밤 10시에도 대낮처럼 환했다. 환한 밤에 잠을 자려니 몸이 근질거려서 일정이 끝나고도 밤늦게 숙소 근방을 돌아다녔다. 몸에 밴 자유여행에의 갈망을 그렇게라도 풀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을 걷다가 마을 주민의 초대도 받고 자작나무가 무성한 숲길을 거닐기도 했다.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일정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마침내 마지막 일정이 돌아왔다. 간호사를 대동한 현지 의사가 우리를 방문했다. 그때는 감기도 많이 나아서 떨리긴 했지만 겁나지는 않았다. 감기랑 코로나를 구별도 못하는 멍청한 진단 키트만 아니면 된다. 예상대로 결과는 음성, 가족에게 이 소식을 전하며 비로소 안도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한국으로 바로 오는 항공편은 없기에 우리는 바르샤바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바르샤바 공항은 매우 붐볐다. 공항은 협소했고 대기자는 많았다. 마스크를 쓴 사람은 우리 일행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옆자리에 앉은 젊은 외국인이 콜록콜록 밭은기침을 해댄다. 음성 확인서를 확인하지 않고 입국을 허용하는 나라도 있어서 누가 환자인지 알 수가 없다.
몇 시간 기다린 끝에 드디어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대기 중에 검역 정보 사전 입력 시스템인 Q-code에 접속해서 검역 정보를 입력했다. 목에 통증이 있나요? 기침을 하나요? 에 체크했다. 아직도 살짝 감기 기운이 남아 있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코로나 음성 확인서가 당당하게 내게 주어진 터였다.
친구가 웃으면서 공항에서 잡으면 어떻게 하려고?라고 했다. 공적 서류는 정직하게 기입하는 법이라고, 나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 인천공항에 내렸다. 나의 큐 코드 입력을 본 검역관이 간단하게 면담할 것이 있다고 가림판이 쳐진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PCR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공항 옆에 있는 검역소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요? 양성이 나오면 격리하나요?”
양성이든 음성이든 집으로 간다고 한다. 그럼 굳이 왜 여기에서? 집에 가서 검사하면 될 일인데, 입국자는 귀국 48 시간 내에 검사가 의무였다.
6시간 걸린다는 검사 결과가 두 시간 반 정도 후에 결과가 나왔다. 양성이란다. 이게 무슨 일? 집에 연락을 하고 친구에게도 빠른 시간에 검사를 하라고 전화했다. 친구 왈, 안 그래도 오는 비행기에서 목이 약간 간질거렸단다. 다음날 친구도 양성으로 나왔다.
거금 십만 원을 들여 방역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와서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첫날은 아무 증세가 없었다. 이튿날 목이 좀 따가웠다. 감기와 확연히 차이나는 통증이었다. 기침할 때 목이 아픈 것이 아니라 가만있어도 후춧가루를 목에 뿌린 듯한 따끔함이 느껴졌다. 3일째 목이 좀 더 따끔거렸다. 5일째 되는 날에는 그 증세가 사라지고 가끔 기침만 나왔다.
오늘이 양성 진단을 받은 지 딱 2주째다. 지금 몸에 남아 있는 증상은 거의 없다. 후유증을 조심하라고 해서 내 몸의 상태를 면밀하게 체크하는데 크게 불편한 것이 없다. 무엇보다 여행 중에 걸리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냐. 언니의 지인은 딸과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가 코로나에 감염되어 천만 원 정도 추가 비용이 들어갔다고 한다. 체류비용과 비행기 티켓 값이란다. 그 돈이면 아프리카 여행을 할 수 있는데, 코로나가 아니었음 벌써 다녀왔을 아프리카 비용이 통째로 날아갈 뻔했다.
약한 놈한테 걸려서 운이 좋다고 세게 앓았던 언니가 농담을 했다.
“그래도 또 놀러 갈래?” 대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재감염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지만 시간은 자꾸 가는데 옴짝 달짝하지 않으면서 세월을 보낼 수는 없다. 코로나가 독감처럼 일상생활에 자리를 잡는 시기를 대략 5년 정도로 본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5년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제 겨우 5부 고개를 넘은 셈이니 끝날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함께 가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운동을 좀 더 열심히 하고 면역력을 키운 뒤에 다시 길을 나서려고 한다는 나의 계획을 들은 지인이 고개를 흔든다. 현지에서 혼자 떨어져 격리 생활을 했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거라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이 많은데, 오지 않는 불행을 예상해서 주저앉기엔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우니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