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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Dec 09. 2018

뷰티풀 데이즈

하루하루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추월 차선에 떡 하니 서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랴.


집에 도착하고 남았을 시간에 나는 초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고속도로에 있었다. 저렇게 내 쪽으로 돌진하는 차들을 위태롭게 바라보면서. 정체로 멈춰있던 내 차를 1톤 트럭이 격하게 들이받은 건데, 일단 나는 살았다. 나를 지켜낸 내 차는 피칠갑된 뒤통수로 병원에 실려갔고 열흘이 다 돼가는 내일께 보수가 끝난다.


충격으로 수백가지 가정과 경우의 수가 머릿속에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트럭이 브레이크를 조금만 더 늦게 밟았다면, 백미러로 트럭의 돌진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필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면, 앞 차가 거리를 벌려주지 않았다면, 졸음을 무시하고 휴게소를 지나쳤다면-


이때만 해도 오로지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수육 수육 수육, 핵 꿀맛! 

그날 오전. 가족과 김장을 했다. 요알못이지만 당당히 김치 속을 넣으며 한 몫을 해냈지비. 누가 보면 숙련된 플레이어처럼 나왔지만 고무장갑이 자꾸 벗겨져서 애를 먹었다. 내 보기에 김치는 양념보다 배추다. 지난해보다 올해 배추가 더 달고 맛있어서 올 겨울은 김치를 와구와구 먹을 작정. 


얼추 80포기를 담그시는 팔순 노모의 김장 루틴. 예전 마당있는 집에 살 적엔 200포기씩 해댔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달겨들어 무슨 잔치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북적였었는데 그에 비하면 을매나 조촐하던지. 하마 팔이 부러져나갈 것처럼 엄살이란 엄살을 다 부려가매 미어져라 수육을 먹고는 느긋하게 출발한 시간이 다섯시 남짓. 그로부터 세시간이 채 안돼 나는 후달리는 다리로 연신 헛구역질을 하면서 매연과 초겨울 바람 속에 영혼을 탈탈 털리게 된다. 


출격을 기다리는 이쁜이들. 

 

'올해는 전날 내려와서 재료 준비하는 것부터 거들라'는 노모의 특별주문이 있었다. 올해는, 이라는 말이 목에 탁 걸렸다. 아마 이 김장은 엄마와 내가 하는 마지막 '체험'이 될 지도 모르겠다. 노모의 관절들이 팔십년의 세월을 견뎌내지 못하고 닳아 줄어들고 있음을 안다. 당신에게는 당사자의 일이니 담담한 것이 어쩌면 당연하대도, 나는 엄마가 그리 멀지 않을 '어떤' 미래를 준비하는 단 한 음절의 단어도 쉽게 소화해내지 못한다. 참혹한 슬픔.


그, 참혹한 슬픔 앞에서 내년부턴 안하시게? 하고 짐짓 몽니를 부렸다. 내년에도 하라고? 히익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도 눈이 웃고 계신다. 노랗고 여린 배춧잎에 양념 슥슥 발라서 자식 입에 넣어주던 세월이 하마 얼마인가. 바쁜 척 잘난 척 온갖 군데에다 재수없게 굴다가도 엄마의 아- 소리 한 번이면 입에 고이는 침을 꼴깍 삼키며 얌전히 무릎을 모으곤 했다. 집밥이라는 달콤한 최면, 모성이라는 다정한 포박. 


자타공인 상위랭커였던 엄마 김치맛은 요 몇년새 평균율을 잃어가는 중이다. 어떤 해에는 간이 알맞고 어떤 해에는 양념이 많거나 짜다. 상관없다. 자식에게 엄마 김치는 고유명사 아닌가. 자꾸만 뒷걸음하는 엄마에게 내년에도 아름다운 날들은 이어질 거라고 최면을 걸어본다. 난 그럼 뭐에다 밥 먹어?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엄마가 웃는다. 내년에도, 아름다울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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