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로펌
법률적인 분쟁에 휩싸인 사람들은 누구나 그럴 테지만 심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시시각각 수사망이 자신에게 조여드는 상황이 되면 그 초조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그러한 반응을 지켜보는 나도 참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K 이사.
중견 건설업체의 자금 담당 이사이다. 오너인 P 회장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 업체에 입사한 이후 20년간 P 회장의 수족처럼 P 회장을 모시면서 최측근으로 활동해 왔다. 그런데 최근 문제가 발생했다. P 회장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해서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혐의로 업무상 배임 · 횡령죄로 검찰의 내사를 받게 된 것이다. 검찰은 P 회장을 압박하기 위해 교묘히 사건 진행상황을 흘리는 한편 K이사를 참고인으로 소환하여 수사를 벌였다. 검찰의 목표는 당연히 P 회장이다.
P 회장은 나를 방문하여 대책회의를 하면서, K 이사는 아직 젊으니 구해야 하며, 모든 문제는 회장 본인이 책임질테니 그런 식으로 검찰에 연락을 취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K 이사는 이러한 P 회장의 의견에 반박하며, 회장님은 가만히 계시라. 어차피 실무적인 일은 이사진들이 한 것 아닙니까. 라면서 내게는 회장님이 ‘경거망동’하지 못하시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는 검찰에서는 이 모든 일을 자신이 주도했으며 P 회장은 구체적인 비자금 조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식으로 진술을 하면서 불똥이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결국 K 이사는 구속되고 P 회장은 입건조차 되지도 않았다. 48시간 동안 검찰은 K 이사를 상대로 삼엄한 추궁을 했으나 K 이사는 끝내 P 회장에게 형사책임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K 이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와서 진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회사가 더 중요합니다. 회장님이 구속되면 회사는 망가집니다. 저는 그걸 막아야 합니다. 회장님을 생각하면 전 이보다 더 한 일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L 상무.
모 유통회사의 자금담당 상무이다. 역시 그 회사도 비자금 문제가 제기되어 검찰이 내사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그 회사의 핵심 간부진들(사장, 전무, 상무, 이사, 부장들)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하게 되었다.
사장은 명시적으로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전무나 상무 선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사장인 내가 없으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나는 몰랐다고 해주고, 그 아래 선에서 누군가 시쳇말로 총대(?)를 매고 검찰 수사에 임해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간부진들, 특히 이 모든 일들을 소상히 알고 있는 L 상무의 입장은 달랐다. 왜 이런 일을 힘없는 월급쟁이 간부들에게 미루려 하는지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최종 결재권자는 사장이므로 사장이 검찰에 출두하여 대응을 하는 것이 ‘결자해지(結者解之)’가 아니겠냐는 입장이었다. 결국 서로 수건돌리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었는데, 중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나로서도 아주 난감한 입장이었다. 결국 그 대책회의에서는 서로 눈치만 보느라 속에 있는 얘기도 못한 상황에서, L 상무가 검찰에 소환되었는데, L 상무가 이틀 정도 수사를 받고 나온 직후 바로 사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고, 그 다음 날 그 사장은 구속되었다. L 상무가 워낙 자세하게 범죄 사실을 자료까지 첨부해서 실토했고, 자신은 그저 사장의 지시에 따라 실무적인 일만 진행한 것이라 변명하며, 이러한 점을 입증할 수 있는 주위 관련자들의 확인서, 녹취서까지 제출하는 바람에 사장은 꼼짝달싹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사장을 구치소에서 접견하면 “L 상무 그 자식이 그럴 수 있나? 내가 그 놈을 어떻게 키워줬는데...”라면서 분개하고, L 상무는 L 상무대로, “오너라는 양반이 이런 일이 있으면 스스로 책임을 지는 듯한 자세를 보여야 아랫사람도 그에 따를 건데, 이건 뭐 자기는 도망가려하면서 힘없는 부하들이 다 뒤집어 쓰라는 거니, 누가 그런 상사에게 충성하겠어? 어림도 없지.”라면서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있었다. 흔히 하는 말로 ‘콩가루 집안’이라고나 할까.
K 이사가 의리의 사나이라서 훌륭하고, L 상무가 야비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L 상무의 행위가 더 바람직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때는 조직의 상사와 부하로서 생사고락을 같이 할 것처럼 의기투합하다가 정작 자신의 신변에 위험한 일이 발생하자 이에 대응하는 방식이 제각각인 것을 보고는 과연 그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봐야 어느 나무의 뿌리가 튼튼한 것인지 알 수 있다든 옛 말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