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논문
* Level 5 Leadership (Jim Collins, 2001)*
세기의 전환기는 언제나 영웅을 갈망했다. 20세기의 끝자락, 세상은 격렬한 변화의 용광로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비범한 개인을 찾아 헤맸다. 잡지 표지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최고경영자(CEO)의 얼굴이 번득였다. 리 아이아코카, 잭 웰치. 그들의 이름은 곧 신화였고, 그들의 말은 시대의 복음이었다. 닷컴 버블의 광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사람들은 단 한 명의 천재가 기업의 운명을, 나아가 세계의 지형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위대한 기업은 필연적으로 위대한 영웅의 피조물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믿음의 성채 아래, 차가운 데이터의 심연을 파고드는 한 무리의 연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대의 열광에 등을 돌린 채, 가장 근원적인 질문 하나를 품고 있었다. 과연 위대한 기업은 한 명의 비범한 영웅이 만드는 것인가? 화려한 언변과 스포트라이트의 포말을 걷어내면, 그 바닥에는 어떤 단단한 진실이 가라앉아 있는가.
# 광기의 시대, 조용한 질문이 시작되다
2001년, 짐 콜린스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Level 5 Leadership'을 발표했을 때, 세상은 여전히 영웅 서사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기술주 열풍이 남긴 잿더미 속에서 시장은 새로운 구원자를 원했고, 언론은 그의 등장을 재촉했다. 기업들은 생존과 도약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수많은 기업이 태어났고, 그보다 더 많은 기업이 소멸했다.
이 혼돈의 한가운데서 콜린스가 던진 질문은 지극히 단순했기에 오히려 혁명적이었다. "평범하게 좋은(Good) 기업은 어떻게 지속적으로 위대한(Great) 기업으로 도약하는가?" 이는 일시적 성공이나 반짝이는 성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최소 15년간 시장 평균을 압도하는 지속적인 위대함, 그 근원에 대한 집요한 탐구였다. 당시 경영계는 스타 CEO의 자서전과 성공담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콜린스와 그의 연구팀은 영웅 신화라는 달콤한 술 대신, 데이터라는 쓰디쓴 약을 선택했다. 그들은 화려한 수사가 아닌, 역사의 퇴적층 속에 숨겨진 사실의 뼈대만을 발라내고자 했다.
# 데이터가 드러낸 뜻밖의 얼굴
그들의 여정은 고독하고 집요했다. 5년의 시간. 1,435개의 기업 검토.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인터뷰와 재무 자료 분석. 연구팀은 위대한 도약을 이뤄낸 11개 기업을 찾아냈고, 그 기업들의 DNA를 한 올 한 올 해부해 들어갔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세상의 통념처럼, 강력한 카리스마와 비범한 통찰력을 지닌 거인의 모습을 발견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데이터가 가리킨 곳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황야였다. 그곳에는 우리가 알던 영웅이 없었다. 대신 스포트라이트를 피하는 조용한 사람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조직을 앞세우는 겸손한 사람들, 그러나 목표를 향해서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강철 같은 의지를 품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콜린스는 이 예기치 않은 발견 앞에서 전율했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위대한 기업의 심장부에는 영웅이 아닌, '5단계 리더(Level 5 Leader)'라 명명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 거인의 두 얼굴: 겸손과 의지
5단계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적 겸손(Personal Humility)과 직업적 의지(Professional Will)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강철을 하나의 용광로에서 녹여낸 리더십의 결정체이다. 이 둘은 역설적으로 결합하여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첫 번째 얼굴, '개인적 겸손'은 나약함이나 소심함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조직의 위대함 뒤로 기꺼이 감추는 용기이다. 콜린스는 이를 '창문과 거울(The Window and the Mirror)'이라는 비유로 명쾌하게 설명했다. 5단계 리더는 성공의 이유를 물으면 창문 밖을 가리킨다.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 팀원, 그리고 행운에게 공을 돌린다. 반면, 실패의 원인을 물으면 거울을 들여다본다. 모든 책임을 오롯이 자신에게서 찾는다. 그들의 자아는 조직의 성공을 위한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 얼굴, '직업적 의지'는 목표를 향한 불굴의 투지이다. 킴벌리-클라크를 평범한 제지 회사에서 세계적인 소비재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다윈 스미스가 그 전형이다. 그는 수줍고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회사의 미래를 위해 핵심 사업이었던 제지 공장을 모두 매각하는 비정하리만치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주변의 모든 이가 미쳤다고 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부드러운 외면 아래에는 그 어떤 카리스마 리더보다 단단하고 매서운 강철이 숨어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5단계 리더를 그저 '착한 사람'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그들은 조직의 영속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스러운 결정도 마다하지 않는 가장 무서운 경쟁자이다. 다만 그 모든 동기가 사적인 명예가 아닌, 오직 조직의 미래를 향할 뿐이다.
# 영웅의 시대는 갔는가
짐 콜린스의 발견은 우리에게 리더십의 본질을 다시 묻게 한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리더라는 이름의 우상을 숭배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콜린스는 그 우상의 제단에서 내려와, 데이터라는 땅 위에 발 딛고 리더십의 진짜 모습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그의 통찰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꿰뚫는다면 이렇다.
"위대함은 화려한 영웅의 칼끝에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운 거인의 고요한 발걸음에서 태어난다."
물론 콜린스의 연구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성공한 기업만을 분석한 '생존자 편향'의 오류가 있다는 날카로운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발견이 던진 충격과 울림은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21세기, 리더의 '겸손'은 위선을 가리는 막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신뢰의 자산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판단을 보조하는 시대, 데이터에 기반한 리더의 냉철한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영웅의 시대는 갔는가.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진짜 영웅의 모습을 알아볼 준비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가장 높은 곳에 있지만 가장 낮은 자세로 일하며, 가장 뜨거운 열정을 품었지만 가장 차가운 이성으로 결단한다.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무대 뒤에서, 묵묵히 내일의 벽돌을 쌓아 올리는 바로 그 사람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리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