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을 긋는 용기, 그것이 당신의 책임

by 조우성 변호사


『T공자의 까칠한 조언』 선(線)을 긋는 용기, 그것이 당신의 책임이다


그들의 친절이 당신의 무덤이 될 때


금요일 오후 5시 30분, 판교의 한 게임회사. 마케터 박서연(29) 대리의 키보드 소리가 잦아들 무렵이었다. 한 주간의 전투가 끝났다는 안도감이 사무실 공기를 희미하게 데우고 있었다. 그때, 옆 팀인 기획팀의 최 부장이 서연 씨의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손에는 USB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박 대리, 미안한데 급한 거 하나만 도와줄래? 우리 팀 김 대리가 갑자기 퇴사해서 말이야. 월요일 아침에 대표님 보고 들어갈 기획안인데, PPT 디자인이 영 엉망이네. 박 대리가 디자인 감각이 좋잖아. 주말에 이것만 좀 다듬어줘.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다’라는 말은 언제나 별거였다. 서연 씨의 업무는 마케팅이지, 기획안 디자인이 아니다. 그러나 거절의 말은 목구멍에서 얼어붙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사내 문화, 최 부장과의 어색해질 관계, 그리고 ‘융통성 없는 직원’이라는 낙인이 먼저 떠올랐다. 그녀는 마지못해 웃으며 USB를 건네받았다. 금요일 저녁의 약속은 취소되었다. 주말 내내 그녀는 남의 팀, 남의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은 협업이 아니라 착취였다.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착각


이 상황의 본질은 개인의 책임감 문제가 아니다. 조직의 구조적 실패다. 역할과 책임(R&R)의 경계가 무너진 조직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숙주 삼아 연명한다.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퇴사는 시스템으로 대응해야 할 경영의 문제이지, 옆 팀 직원의 선의에 기댈 사안이 아니다.

한국의 직장 문화는 종종 ‘가족주의’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역할의 경계를 허문다. 이는 효율적인 협업이 아니다. 명백한 책임 전가다. ‘내 일’과 ‘네 일’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순간, 업무의 무게는 가장 유능하거나 가장 만만한 자에게 쏠린다. 부당한 업무 지시에 순응하는 것은 책임감이 아니라, 자기 역할에 대한 방임이다. 그 침묵은 결국 자신의 전문성을 갉아먹고, 조직 전체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공범 행위다.


공자의 선 긋기


공자의 언어는 차갑고 명료하다. 그는 관계의 온정주의를 말하지 않았다. 질서를 말했다.


“不在其位, 不謀其政 (부재기위, 불모기정).”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


이는 『논어』 「태백(泰伯)」편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이 말은 단순히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소극적 충고가 아니다. 모든 역할에는 고유한 권한과 책임이 있음을 천명하는 선언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 곧 질서의 시작이며,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질서를 파괴하는 월권(越權) 행위라는 뜻이다.


월권(越權)은 친절이 아니다


전통적 해석은 이 구절을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권한을 침범하지 말라는 수직적 규율로 좁혀왔다. 그러나 원문의 칼날은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다. T적 관점에서 이 문장은 경계 설정(Boundary-setting)과 효율성(Efficiency)이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 당신이 남의 자리를 넘보지 않아야 하듯, 남도 당신의 자리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상호성의 원칙이 숨어 있다.

이는 순자(荀子)가 말한 ‘명분론(名分論)’의 핵심과도 통한다. 사회는 각자의 이름(名)에 걸맞은 역할(分)을 수행할 때 안정된다. 마케터는 마케터의 일을, 기획자는 기획자의 일을 해야 한다. 기획자가 마케터에게 PPT 디자인을 떠넘기는 것은 이 ‘명분’을 어기는 행위다. 현대 경영학의 언어로 바꾸면, 이것은 ‘직무 기술서(Job Description)’의 원칙이다. 직무 기술서는 당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구분하는 법적, 논리적 방어선이다.


공자가 만약 현대 기업의 인사팀장이었다면, 직무 기술서부터 명확히 작성하고 ‘범위 외 업무 지시는 명백한 부당 노동 행위’라는 사내 규정 제1조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온정주의자가 아니라 시스템 설계자였다. ‘좋은 관계’를 위해 역할을 희생하는 것은 시스템 전체를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다. 공자의 ‘불모기정’은 이기심의 표현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건강을 위한 가장 냉철한 실용성의 발현이다.


금요일 오후 5시 30분, 당신의 책상 앞에서


다시 금요일 오후 5시 30분, 박서연 대리의 자리로 돌아가자. 최 부장이 웃으며 USB를 내민다. 이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T공자의 원칙을 적용한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일단,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속담은, 반대로 말하면 웃는 얼굴로 거절하면 상대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부장님, 팀이 어려우신 상황이라 마음이 쓰이네요.” 공감의 표현은 방어막이다.


그다음, 사실과 원칙에 기반해 질문한다. “그런데 이 업무는 기획팀의 고유 업무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걸 맡게 되면 현재 진행 중인 A마케팅 캠페인 최종 보고서 작업에 차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절이 아니라, 팩트를 기반으로 한 상황 보고다.

마지막으로, 책임의 공을 상사에게 넘긴다. “제 상사인 김 팀장님과 먼저 논의해 주시면 어떨까요? 팀장님께서 제 업무 우선순위를 조정해주시면 따르겠습니다.” 이는 문제를 개인 대 개인의 부탁이 아닌, 팀 대 팀의 공식 업무 협조 요청으로 격상시키는 행위다. 당신은 싸우는 게 아니라, 절차를 따를 뿐이다.


당신의 책임을 재정의하라


이제 당신이 할 일은 명확하다. ‘좋은 사람’이라는 모호한 평판을 지키기 위해 당신의 권리와 책임을 방치하지 마라. 다음 행동 원칙을 당신의 무기로 삼아라.

당신의 직무 기술서를 숙지하고 공유하라. 그것은 당신의 영토를 규정하는 지도다. “제 주요 업무는 A, B, C입니다”라고 명확히 인지시키고, 그 지도를 벗어나는 요구에는 경고등을 켜라.


단순 거절 대신 ‘조건부 수락’과 ‘질문’을 활용하라. “그 일을 맡으려면, 기존 업무 X의 마감 기한을 이틀 늦춰주셔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선택권을 상대에게 넘겨라. 이것은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현실적인 자원 배분에 대한 논의다.


모든 부당한 요청을 기록으로 남겨라. 구두 지시는 휘발된다. 메일이나 메신저로 “부장님, 방금 요청하신 OOO 업무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차 메일 드립니다”라고 기록을 남겨라. 기록은 당신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못한다’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말하라. ‘못한다’는 능력의 문제지만, ‘할 수 없다’는 규칙과 상황의 문제다. 당신의 무능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임을 명확히 하라. 이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정직함이다.


경계는 벽이 아니라 기둥이다


관계의 경계를 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 선은 당신을 고립시키는 벽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과 조직을 무너지지 않게 받치는 기둥이다. 책임의 경계가 무너진 곳에서 프로는 사라지고 희생자만 남는다.

당신은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의 일을 할 권리가 있다. 당신의 시간을 지키고, 당신의 전문성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2500년 전 공자가 말한 ‘정치(政治)’의 가장 작은 시작점이며, 오늘 당신이 스스로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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