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은 종종 하나의 문(門) 앞에서 좌절한다. 현업부서 담당자와 피땀 흘려 공들인 일이, 구매팀 책상 앞에서 '가격'이라는 단어 하나에 막혀 산산조각 난다. 혹은, 구매팀이 주관하는 입찰의 수렁에 빠져, 정작 우리가 만든 물건을 누가 쓰는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가격 출혈만 강요당한다.
이것은 운이 나빠서가 아니다. 전략이 부재한 자의 필연적 패배다.
당신은 '갑'이라는 하나의 거대 조직과 싸우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는 환상이다. '갑'이라는 성(城)은 하나의 조직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서로 다른 목표와 언어를 가진 두 개의 세력, '구매팀'과 '현업부서'가 존재한다.
제12장에서 우리는 '사람 대 사람'의 신뢰를 구축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제4의 무기, 관계의 기본이다. 이제 그 관계를 이용해 '갑'이라는 조직의 복잡한 지도를 읽고, 두 개의 전선(戰線)을 동시에 공략하는 '투트랙 전략'을 실행할 차례다.
성을 공략하려면 성의 구조부터 파악해야 한다.
'갑'의 의사결정 구조는 이원적이다. '구매팀'은 공식적인 성문(城門)이다. 그들은 계약서와 프로세스라는 법을 집행하는 문지기다. 그들에게는 거래를 '승인'하거나 '거부'할 공식적 권한(Authority)이 있다.
'현업부서'는 성의 주인이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핵심부다. 그들은 당신의 서비스나 제품을 실제로 사용하는 '고객'이다. 그들에게는 공식적 계약 권한이 없을지라도,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영향력(Influence)'이 있다.
진짜 최종 결정권자는 누구인가. 그는 구매팀장인가, 현업 본부장인가, 아니면 둘의 보고를 받는 임원인가. 그 지도를 먼저 그려야 한다. 그리고 이 두 세력이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꿰뚫어야 한다.
구매팀의 언어: 가격, 조건, 리스크, 프로세스
구매팀은 '가치'가 아닌 '가격'으로 말한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비용 절감과 리스크 관리다. 그들은 당신의 기술이 얼마나 혁신적인지 관심 없다. 그 기술이 정해진 예산 안에 들어오는지, 기존 프로세스와 충돌하지 않는지, 법적 문제는 없는지만 따진다. 그들에게 '성능'을 말하는 것은, 맹인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현업부서의 언어: 품질, 성능, 편의성, 혁신
현업부서는 '가격'이 아닌 '가치'로 말한다. 그들은 당장 자신의 일이 편해지기를 바란다. 당신의 솔루션이 자신의 성과(KPI)를 높여주기를 기대한다. 그들에게 '가격'부터 말하는 것은, 명의(名醫)가 진맥도 없이 약값부터 흥정하는 것과 같다.
전략이 없는 '을'은 이 두 언어 앞에서 혼란에 빠진다. 구매팀에 가서는 "품질이 좋다"고 외치고, 현업부서에 가서는 "싸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둘 다 실패한다.
전략가는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한다. 그리고 두 개의 전선을 치밀한 순서로 공략한다. 이것이 '투트랙 전략'이다.
1단계: 현업부서를 먼저 공략하라.
구매팀의 문을 먼저 두드리는 것은 하수(下手)다. 그들은 당신을 수많은 '을' 중 하나로 취급하며 가격표부터 요구할 것이다.
먼저 제12장에서 닦은 '관계'를 발판 삼아, 제3의 무기 '전문성'을 들고 현업부서를 찾아가야 한다. 그들의 진짜 고충을 듣고, 그들이 인지하지 못한 문제까지 진단하여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10장 참조). 당신은 '납품업체'가 아닌 '솔루션 파트너'로 포지셔닝해야 한다.
2단계: 현업이 스스로 '요청'하게 만들라.
핵심은 당신이 '파는' 것이 아니라, 현업이 '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의 솔루션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대안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들이 당신의 솔루션을 쓰지 못하면 자신의 성과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이 단계가 성공하면, 현업부서는 당신의 '외부 영업사원'에서 '내부 옹호자'로 변모한다. 그들은 스스로 구매팀의 문을 두드려 "우리는 B사의 솔루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청하기 시작한다.
3단계: 구매팀에는 '명분'을 제공하라.
이제 구매팀을 만날 차례다. 이때 당신의 입에서 "현업부서에서..."라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당신은 현업의 요청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자가 아니다.
당신은 구매팀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그들의 프로세스를 존중하고, 그들의 리스크를 관리해주어야 한다. "현업이 원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장기적으로 귀사의 비용을 절감하며, 다른 대안 대비 리스크가 가장 적은 '합리적' 선택"임을 증명하는 데이터를 제시해야 한다. 현업의 '필요'를 구매의 '논리'로 번역해야 한다.
4단계: 두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지게 하라.
최종 결정권자의 책상에는 두 개의 보고서가 올라간다. 현업의 "이것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요구와, 구매팀의 "프로세스와 가격에 문제가 없다"는 합리적 검토. 이 두 가지가 일치할 때, 계약은 성사된다.
만약 구매팀이 여전히 가격으로 반발한다면, 당신이 아닌 현업부서가 그들과 싸우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승리다.
협상은 시스템이 아닌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조직'이라는 복잡한 그물 속에 묶여 있다.
제4의 무기, 관계는 이 그물의 매듭을 푸는 기술이다.
지금 당장 당신의 '갑'을 분석하라. 당신은 누구와 접촉하고 있는가. 구매팀인가, 현업부서인가. 당신은 그들에게 각각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혹시 현업의 언어로 구매팀을 설득하거나, 구매의 언어로 현업의 마음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의 채널에만 의존하는 자는 패배한다.
현업의 마음을 사로잡아 '필요'라는 창을 만들라. 그리고 구매팀의 논리를 충족시켜 '명분'이라는 방패를 쥐여주라. 두 개의 무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갑'의 성문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