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가 칼이 되는 순간: 규범(規範)이라는 무기

by 조우성 변호사

'공정성'과 '상식'을 무기로 활용하라


전장은 언제나 불공정하다. ‘갑’은 ‘을’에게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부당함을 요구한다. 일방적 단가 인하 통보, 명분 없는 추가 업무 지시, 불명확한 대금 지급 지연. 이것은 거래가 아니라 약탈이다.


이때 을은 분노하거나 체념한다.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혹은 “너무 부당하다”고 읍소한다. 둘 다 패자의 언어이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구걸이다. 힘이 없다고 좌절하는 것은 무지의 고백이다.


을의 가장 큰 착각은 힘이 오직 ‘갑’의 지갑이나 지위에서만 나온다고 믿는 것이다. 아니다. 힘은 ‘정당성’에서도 나온다. 부당함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분노가 아닌 ‘규범(Norm)’이다. 이것이 우리가 연마할 제5의 무기이다. ‘공정함’과 ‘상식’은 감상의 영역이 아니라, 가장 냉철한 전략의 영역이다.


힘의 근원을 재정의하라


규범적 힘(Normative Power)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 정당성이 부여하는 힘이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합의한 ‘옳음’의 기준을 내 편으로 끌어오는 능력이다. 이것이 ‘떼쓰기’와 ‘정당한 요구’를 가르는 경계이다. 떼쓰기는 ‘나의 이익’을 외치지만, 정당한 요구는 ‘우리의 기준’을 말한다. 갑도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이 기준을 무시할 때 비용을 치른다.


이 무기는 네 개의 날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법적 규범이다. 가장 단단하고 공식적인 방패다.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표준계약서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은 갑과 을의 사적 계약 이전에 존재하는, 시장 전체의 규칙이다. 이 법을 모르는 것은 갑옷 없이 전장에 나서는 것과 같다.


둘째, 업계 규범이다. 법전에 없으나 시장이 인정한 불문율이다. 업계의 표준 가격 범위, 통용되는 거래 조건, 일반적인 관행이다. 갑 역시 이 시장 안에서 생존해야 하기에, 업계의 표준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다.


셋째, 사회적 규범이다. 가장 넓고 때로는 가장 무서운 규범이다. 공정성, 상호성, 투명성의 원칙이다. “우리만 손해 볼 수는 없다”는 상호성의 원칙, “하는 만큼 받아야 한다”는 공정성의 원칙은 단순한 도덕이 아니다. 갑이 가장 두려워하는 평판의 리스크를 건드리는 뇌관이다.


넷째, 조직 규범이다. 가장 은밀하고 날카로운 비수다. 바로 갑의 내부 규정, 윤리강령, 행동 준칙이다. 많은 을들은 갑의 내부 규정을 모르고 싸운다. 그러나 갑의 담당자 역시 조직의 일원이기에, 자신의 내부 규범을 위반하는 것은 그에게도 부담이다.


이 네 가지 규범은 협상 테이블에서 갑의 의자가 아닌, 제3의 객관적 심판자를 소환하는 효과를 낸다.


‘우리’의 요구를 ‘기준’의 요구로 바꿔라


협상 테이블에 갑이 무리한 요구를 던졌다. 지난 분기 대비 20%의 일방적 단가 인하다. 근거는 없다. 그저 “시장이 어려우니 고통을 분담하자”는 말뿐이다.


패배하는 을은 이렇게 말한다. “저희가 너무 힘듭니다.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이것은 읍소다. 갑의 담당자는 “나도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다”고 답하며 방어벽을 친다. 대화는 끝났다.


그러나 규범이라는 무기를 든 검객(劍客)은 다르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준비한 자료를 꺼낸다. 그는 “우리가 원해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준이 그러하다”고 말한다.


“담당자님의 고충은 이해합니다. 다만 저희가 검토한 바, 요청하신 인하율 20%는 업계 평균 변동률(업계 규범)인 5%를 크게 상회합니다. 또한, 이는 귀사(갑)의 공식 윤리강령 3조 ‘협력사와의 공정 거래 및 상호 성장 원칙’(조직 규범)과도 배치될 소지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는 객관적 원가 상승 요인을 반영하지 않은 일방적 결정으로, 공정거래법상 ‘부당한 대금 감액’(법적 규범)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역전된다. 이제 공은 갑에게 넘어갔다. 을은 자신의 ‘힘듦’을 호소한 것이 아니라, 갑이 스스로 정했거나(조직 규범), 갑이 속한 시장이 정한(업계 규범) 객관적 기준을 제시했다. 갑은 이제 을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기준’과 ‘자신의 규범’을 부정해야 하는 입장에 선다.


이것이 ‘규범 프레이밍’의 힘이다. 싸움의 본질을 ‘갑 대 을’의 힘겨루기에서 ‘갑의 요구 대 객관적 기준’의 정합성 문제로 전환시키는 기술이다. 정당한 기준을 무시하는 갑은, 힘센 강자가 아니라 규칙을 어기는 범법자 혹은 이기주의자로 프레임이 바뀐다.


감정을 버리고 근거를 수집하라


제5의 무기, 규범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철저한 논리와 근거에 기반한 전략 병기다. 이 무기는 감정적인 을이 아니라 냉철한 을에게만 쥐어진다.


당장 당신의 칼집에 채워야 할 것들이 있다. 법적 규범(관련 법령 조항), 업계 규범(경쟁사 동향, 시장 리포트, 가격 변동 데이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갑의 조직 규범(윤리강령, 홈페이지에 공개된 파트너십 원칙)이다. 이것이 당신이 확보해야 할 근거 자료다.


부당함을 만났을 때,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이 자료들을 수집하라. 협상은 말의 성찬이 아니다. 힘의 저울질이다. 그리고 이 ‘규범’이라는 근거 자료의 무게가 곧 당신의 힘이다.


힘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드는 것이다. 공정함과 상식은 당신이 그것을 객관적 데이터와 논리로 벼려내어 ‘무기’로 만들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구걸을 멈추고 증거를 제시하라. 그것이 약자가 정당성을 무기로 삼아 승리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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