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의 명분을 세워주며 실리를 취하는 법

by 조우성 변호사

'갑'의 명분을 세워주며 실리를 취하는 법


을은 협상 테이블에서 이기려 한다. 갑의 논리를 반박하고,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애쓴다. 이것은 전장의 한복판에서 적장의 목을 베려는 것과 같다. 용맹해 보이나 어리석다. 당신이 이기면, 테이블 맞은편의 담당자는 그의 조직 안에서 패배자가 된다. 패배한 담당자는 당신의 원수가 될 뿐, 다시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승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협상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진정한 승리는 갑의 담당자가 자신의 성채로 돌아가 승전보를 울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승리가 곧 당신의 승리가 되도록 판을 설계해야 한다. 이것이 지략이다. 당신은 갑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갑의 담당자를 당신의 대리인으로 만들어, 그의 조직을 대신 설득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의 손에 칼이 아닌 승리의 명분을 쥐여줘야 한다.


명분, 실리를 감싸는 비단보


‘윈윈(Win-Win)’은 허울 좋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냉혹한 현실 인식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갑의 담당자 역시 그가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선다. 조직 내에서의 인정, 성과, 그리고 상사로부터의 칭찬이다. 따라서 당신의 제안은 그의 승리를 위한 각본이 되어야 한다. 이 각본을 짜는 데는 세 단계의 치밀한 설계가 필요하다.

1단계는 담당자의 내부 보고 라인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가 누구에게 보고하는가. 그의 상사는 무엇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가. 구매팀장은 원가 절감에 목을 매지만, 그의 위에 있는 본부장은 신제품 출시 성공률이나 시장 점유율에 더 관심이 많을 수 있다. 적의 지휘 체계를 모르면 급소를 찌를 수 없다.

2단계는 그의 상사를 설득할 논리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당신의 제안이 단순히 ‘좋은 제품’이라는 사실을 넘어, ‘담당자의 상사가 중시하는 목표 달성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줘야 한다. ‘우리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것은 하수다. ‘이 기술이 귀사 본부장님의 핵심 목표인 시장 점유율을 0.5% 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상수다.

3단계는 그 논리를 증명할 보고용 자료까지 제공하는 것이다. 담당자는 게으르거나 바쁘다. 그가 당신의 논리를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여 보고서를 쓸 것이라 기대하지 마라. 당신이 직접 만들어줘야 한다. 핵심 데이터가 담긴 한 페이지 요약본, 명료한 그래프, 경쟁사 대비 우위 분석표. 그가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완벽한 탄환을 장전해줘야 한다.


전장의 언어를 다시 배우라


한 부품 제조사(을)가 대기업(갑)에 납품가를 10% 인상해달라고 요청했다. 구매 담당자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의 KPI는 원가 절감이었다. 이 전장에서 대부분의 을은 좌절하고 물러선다. 그러나 이 제조사의 대표는 달랐다. 그는 전장의 언어를 아는 자였다.

그는 다시 미팅을 요청했다. 그는 가격 인상의 불가피함을 호소하는 대신, 전혀 다른 판을 깔았다. “팀장님, 저희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은 당연합니다. 원가 절감이라는 팀장님의 임무를 저희는 존중합니다.” 그는 먼저 적의 입장을 인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무기를 꺼냈다.

“다만, 이 사안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하실 수 있는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그가 내민 것은 한 장의 보고서였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신형 부품을 사용했을 때, 갑의 최종 제품 불량률이 3% 감소하고 A/S 비용이 연간 5억 원 절감된다는 시뮬레이션 데이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갑의 생산팀과 품질관리팀의 인터뷰를 통해 얻어낸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팀장님께서 이번 인상안을 수용해주시는 대신, ‘전략적 파트너 교체를 통한 연간 5억 원 비용 절감 및 품질 혁신 주도’라는 제목으로 본부장님께 보고하실 수 있습니다. 단순 구매 비용 10% 인상이 아니라, 총소유비용(TCO) 관점의 혁신 사례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여기 보고에 쓰실 핵심 요약본입니다.”

협상 테이블의 공기는 미묘하게 변했다. 구매 담당자는 더 이상 가격을 깎으려는 수비수가 아니었다. 그는 조직 내에서 자신의 공을 세울 기회를 발견한 사냥꾼이었다. 그는 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을에 대한 선의가 아니었다. 자신의 승리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을은 실리를 얻었고, 갑의 담당자는 명분과 성과를 얻었다. 이것이 거래의 본질이다.


적을 위한 승전고를 울려라


당신의 제안서를 다시 보라. 그것은 당신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파트너가 될 담당자의 승리를 위한 명분을 담고 있는가. 당신의 언어로 말하지 마라. 갑의 담당자가 그의 상사에게 보고할 언어로 말해야 한다.

요구하지 마라.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승리의 경로를 설계하고 제시하라. 당신은 단순한 납품업자가 아니다. 당신은 갑의 담당자를 위한 전략가이자 참모가 되어야 한다. 그의 손에 당신의 요구사항이 적힌 종이 대신, 그의 이름으로 올라갈 승전보를 쥐여주어야 한다.

힘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상대를 나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설계 능력에서 나온다. 갑의 명분을 세워주는 것은 자존심을 버리는 패배가 아니다. 실리를 얻기 위한 가장 지능적인 승리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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