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활용하되, 법정(法廷)으로 가지 마라

by 조우성 변호사


법은 최후의 무기다: 법을 활용하되, 법으로 가지 마라


일은 끝났다. 돈이 오지 않는다. 을이 겪는 가장 모욕적이고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약속된 대금이 한 달, 두 달 밀리기 시작한다. 담당자는 전화를 피하거나 “위에서 결재가 안 났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피가 마른다.


이때 을은 두 가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하나는 읍소다. “제발 살려달라”고 매달린다. 이것은 구걸이며, 갑은 을을 더욱 얕잡아 본다. 다른 하나는 폭발이다. “당신들, 고소하겠다”며 감정을 터뜨린다. 이것은 자멸이다.


법(法)은 약자가 쥔 최후의 무기다. 규범이라는 방패 중 가장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 무기는 양면성을 지닌다. 법은 가장 강력한 힘인 동시에, 최악의 선택이다. 법정에 서는 순간, 승패와 무관하게 관계는 끝난다. 모든 신뢰가 무너지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법정에서 이기는 것(勝訴)이 아니다. 법을 활용하여, 법정까지 가지 않고 상대를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칼을 뽑아 상대를 베는 기술이 아니라, 칼집에 손을 댄 채 칼의 서슬 퍼런 기운만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검객(劍客)의 기술이다.


위협이 아닌 ‘정보’로 법을 언급하라


하수(下手)는 감정이 격해지면 “법대로 합시다!”라고 소리친다. 이는 ‘선전포고’다. 갑의 담당자는 방어기제를 발동한다. 그는 즉시 법무팀에 연락하고, 을을 ‘적’으로 규정한다. 이제 대화는 없다. 전쟁만 있을 뿐이다.


고수(高手)는 결코 법을 위협의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 ‘정보 제공’과 ‘리스크 관리’의 프레임으로 사용한다.



(X) 잘못된 접근: “이거 하도급법 위반입니다. 당장 고소하겠습니다.”


(O) 전략적 접근: “저희가 내부 법무 검토를 해보니, 현재의 대금 지연 건이 추후 양사 모두에게 법적 리스크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 공정거래위원회 가이드라인의 OOO 항목에 해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저희는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고 싶습니다.”



이 접근은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마주한 문제’로 프레임을 바꾼다. “당신을 고소하겠다”가 아니라 “우리의 관계가 법적 분쟁이라는 암초에 걸릴까 우려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위협이 아니라 ‘정보’이며, ‘경고’가 아니라 ‘걱정’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이 전략적 언급은 3단계로 실행되어야 한다.


1단계: 법적 근거의 확보.


가장 먼저 할 일은 전문가의 자문이다. 변호사나 공정거래조정원을 통해 나의 주장이 감정이 아닌, 명백한 법률과 판례에 기반하고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칼집 속의 칼이 목검(木劍)이 아니라 진검(眞劍)임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2단계: 우호적 경고.


실무 담당자에게 먼저 이 ‘우려’를 전달한다. 공식 문서가 아닌, 정중한 미팅이나 이메일을 통한다. “저희는 이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저희도 생존을 위해 원치 않는 조치를 검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상대를 구석으로 몰되, 빠져나갈 퇴로를 열어주는 것이다.


3.단계: 공식 통지.


우호적 경고가 무시되면, 최후통첩을 보낸다. 이것이 내용증명(內容證明)이다. 내용증명은 법적 효력은 없으나,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기록을 남긴다. 이것은 칼을 뽑아 겨누는 마지막 동작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갑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다.


전장의 묘사: E사의 부당 대금 지연 대응 전략


부품 공급사 E사는 ‘갑’의 고질적인 대금 지연에 시달렸다. 계약서상 ‘검수 후 60일 이내 지급’ 조항은 휴짓조각이었다. 90일, 120일이 넘어가기 일쑤였다. E사의 현금 흐름은 막혔고, 도산 위기에 몰렸다.


E사의 대표는 분노로 법무사를 찾아갔지만, 마지막 순간에 전략을 수정했다. 법정 싸움은 승리해도 상처뿐임을 알았다. 그는 법을 ‘무기’가 아닌 ‘방패’로 쓰기로 결심했다.


E사의 전략은 3막으로 전개되었다.


1막: 근거의 확보.


E사는 공정거래법 전문 변호사에게 자문했다. ‘갑’의 행위는 명백한 하도급법상 ‘부당한 대금 지연’이었으며, 지연 이자까지 청구할 수 있는 사안임을 확인했다. E사는 이 자문 결과를 바탕으로 ‘갑’에게 전달할 ‘법적 리스크 검토 보고서’ 초안을 만들었다.


2막: 우려의 전달과 명분의 제공.


E사 대표는 ‘갑’의 구매팀장을 만났다. 그는 소송 서류가 아닌, 자사의 재무 상태표와 법률 검토 의견서를 내밀었다.


“팀장님, 저희가 이 지경입니다. 저희는 귀사와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현재의 상황이 하도급법의 특정 조항을 위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문제가 외부(공정위)로 알려지면, 귀사의 평판과 시스템에도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는 위협하지 않았다. ‘우려’를 공유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수를 두었다. ‘갑’의 명분을 세워주는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분쟁이 아닙니다. 안정적인 거래입니다. 차라리 공식적으로 대금 지급 기한을 90일로 늘려 주십시오. 대신, 검수 완료 즉시 세금계산서를 발행하고 90일 만기 전자어음으로 결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그 어음을 할인하여 자금을 유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양사 모두 법적 리스크 없이 상생하는 길입니다.”


3막: 협상과 결과.


‘갑’의 구매팀장은 안도했다. E사가 ‘고소’가 아닌 ‘해결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는 E사가 제시한 ‘법적 리스크’라는 칼날과 ‘어음 결제’라는 명분을 들고 내부 보고를 올렸다. ‘갑’의 경영진은 골치 아픈 법적 분쟁을 피하고, 현실적인 대안(어음)을 받아들였다.


E사는 당장의 현금 대신 90일 만기 어음을 받았지만, 예측 가능한 자금 흐름을 확보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 이후 ‘갑’은 E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E사는 ‘규칙을 아는 파트너’로 격상되었다. 관계는 깨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건강하고 투명해졌다.


법은 방패다, 칼이 아니다


E사의 사례는 법이라는 무기의 핵심을 보여준다. 법은 상대를 베기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다.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고, 상대의 부당한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다.


법을 언급하는 순간은 가장 냉철해야 하는 순간이다. 감정은 한 점도 섞여서는 안 된다. 법적 대응 시 주의사항은 명확하다. 첫째, 절대 첫 번째 카드로 쓰지 마라. 둘째, 감정적으로 위협하지 마라. 셋째, 반드시 상대가 빠져나갈 명분(퇴로)을 함께 제시하라.


힘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법률 지식은 당신의 힘이다. 공정거래위원회, 대한상사중재원, 중소기업법률지원단 같은 기관들은 당신의 무기고다. 이 무기들을 숙지하고 칼을 갈아 두어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검객은 그 칼을 뽑지 않고 이긴다. 법을 방패로 삼아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복귀시키고, 정당한 실리를 취하라. 그것이 약자가 법을 다루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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