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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의 편지, 그 절박한 연대의 기록

by 조우성 변호사

유배지에서의 편지, 그 절박한 연대의 기록


1801년 봄, 정조의 죽음과 함께 조선의 정치 지형은 급변했다. 신유박해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남인 일파의 몰락만이 남았다.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40세의 정약용 앞에 놓인 것은 18년이라는, 형량도 끝도 알 수 없는 시간이었다.


유배지에서 정약용이 선택한 것은 붓이었다. 그는 형에게, 아들들에게, 제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어떤 날은 한 통, 어떤 날은 세 통. 편지는 단순한 안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증명이자, 가문 재건의 설계도이자, 학문적 토론의 장이었다. 특히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보낸 편지는 교육서이자 유언이었다. "우리는 폐족이다. 하지만 폐족이 폐족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독서뿐이다."


1810년, 유배 10년차. 부인 홍혜완은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보냈다. 빛바랜 천에는 18년을 기다려온 한 여인의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정약용은 그 치마를 잘라 편지지로 삼았다. 이것이 '하피첩'이다. 어머니의 혼례복에 아버지의 교훈이 새겨진 이 서첩은, 조선 시대 가족애의 가장 절절한 유물로 남았다.


형 정약전과의 편지 교환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흑산도와 강진, 두 유배지 사이를 오간 편지에는 학문적 토론과 생존의 고충이 공존했다. 정약전이 고기를 구하기 어렵다고 하자, 정약용은 들개를 잡아 삶는 법까지 상세히 적어 보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집필하며 서로의 초고를 검토했다. 정약용은 훗날 "약전 형님이 나보다 낫다"고 회고했다. 1816년,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사망했다. 정약용은 "나를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을 잃었다.


18년간 정약용이 쓴 편지는 수백 통에 달한다. 그 편지들은 단순한 통신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지식인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직조해낸 기록이다. 1818년,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난 정약용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붓은 멈추지 않았다. 아들들에게, 제자들에게, 그는 여전히 편지를 썼다. 500여 권의 저술과 수백 통의 편지. 그것은 한 인간이 절망을 학문으로, 고독을 연대로 바꾼 위대한 투쟁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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