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는 1심 변호사로부터 판결문을 건네받았다. 사무실을 나왔다. 판결문을 꽉 쥐었다. 종이는 차갑고 무거웠다. '기각(棄却)'. 정교하게 인쇄된 그 두 글자가 흰 종이 위에서 칼날처럼 도드라졌다. 2016년의 봄은 미세먼지로 탁했고, 쏟아지는 소나기는 지독하게도 비릿했다.
절뚝이는 오른쪽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깁스 위로 스민 빗물은 돌덩이처럼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1심 재판장은 그를 끝내 '사장님'이라 불렀다. 사장님이기 때문에 산재는 안 되고, 사장님이기 때문에 대리점의 구역 회수는 '경영상의 필요'라고 했다. 법은 서류로만 말한다는 변호사의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시작은 1년 6개월 전이었다. "박 사장, 운영상 어쩔 수 없잖아. 조카가 이제 막 일을 시작했는데, 좋은 구역은 젊은 친구한테 맡겨야지." 대리점주 조 소장이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계약서 3조 2항이었다. '운영상 필요에 따라 구역을 임의 조정할 수 있다'. 단 열한 자의 문장이 박철수가 딸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7년 동안 닦아놓은 '황금 구역'을 도려냈다. 4,000만 원이라는 권리금은 비명도 없이 증발했다.
그날 이후 박철수의 일상은 70개의 계단으로 치환되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5층까지 2L들이 생수 6개입 4묶음을 어깨에 멨다. 소송이 진행되는 중에도 생계는 멈출 수 없었다. 주머니 속 갤럭시 노트7이 터질 듯한 열기를 뿜어낼 때마다 박철수는 자신의 무릎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빗길에 미끄러져 인대가 파열된 날, 조 소장은 위로 대신 '용차비 1.5배 정산'이 적힌 계산서를 내밀었다.
"항소는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비용만 더 들어요." 1심 변호사는 귀찮다는 듯 책상 구석에 있던 포스트잇에 뭔가를 휘갈겨 밀어냈다. "정 억울하시면 부암동에 있는 여길 가보세요. '다시'라고, 좀 독특한 로펌인데... 여긴 항소심만 하거든요."
부암동 오르막길 끝, 한쪽 모서리를 따라 담쟁이가 성큼성큼 올라간 붉은 벽돌 건물 2층에 희미한 전구 빛이 켜져 있었다. 작은 간판은 '다시(Again)'라는 글자만 겨우 빛나고 있었다. 박철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사무실 내부는 평화롭다 못해 정체된 공기가 흘렀다. 이현 대표는 구석 책상에 앉아 낡은 인문학 서적을 넘기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정적을 깨는 것은 복사기 앞에 거꾸로 매달린 고필승의 웅얼거림뿐이었다. "아니, 왜... 지금..." 고필승의 하얀 셔츠 소매에 검은 토너 가루가 묻어 있었다. 그는 복사기 안쪽에서 찢어진 종이 한 조각을 사투 끝에 뽑아냈다. 그때 종소리가 울렸다.
박철수가 절뚝이며 들어오자 고필승이 황급히 다가왔다. "변호사 고필승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중하게 내민 손에는 명함 대신 'GS25 부암점 - 혜자 도시락 3,800원'이라 적힌 영수증이 들려 있었다. 고필승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영수증을 낚아채며 새 명함을 내밀었다.
회의실 탁자 위로 박철수의 낡은 목장갑과 판결문이 놓였다. 이현 대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박철수를 따뜻하게 보았다. 억울하다는 건 자기가 옳다는 걸 아는데 아무도 안 들어주는 것이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변호사가 할 일의 절반은 한 셈이다. “박 사장님, 처음부터 다시 말해주세요. 전체 이야기를 다 듣고 싶군요."
이현의 말이 끝나자 옆에서 조용히 서류를 훑던 양세리가 펜을 내려놓았다. "형식적으론 지입차주 위수탁 계약이네요. 3조 2항... 여기 도장도 직접 찍으셨고". 그녀는 비난도 동정도 섞이지 않은 건조한 어조로 덧붙였다. "법적으로만 보면 1심 판결이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 서류들을 뒤집을 '다른 사실'이 없다면요".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마봉림이 들어왔다. "아니, 에어컨 좀 꺼! 추워 죽겠네!" 그녀는 리모컨을 뺏어 온도를 28도로 올렸고, 차기준은 대꾸도 없이 다시 24도로 내렸다. 차기준은 박철수의 낡은 신발을 한 번 훑고는 다시 자신의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같은 시각, 강남 테헤란로의 법무법인 화천강. 32층의 공기는 필터로 여과된 듯 차갑고 무취에 가까웠다. 통유리 너머의 야경을 집어삼킬 듯한 LED 조명 아래, 최시영이 자문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고필승의 잉크 묻은 셔츠와 달리, 그의 수트는 구김 하나 없이 매끈했다.
회의실 한쪽에는 장식용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화천강의 파트너들은 이제 인간의 직관보다 시스템의 연산을 더 믿기 시작했다.
“수고했습니다, 최 변호사.” 이준형이 나타났다. 그의 그림자가 대리석 바닥 위로 정교하게 뻗었다. 그는 최시영이 제출한 보고서를 훑고는 짧지만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구조가 깔끔하네요. 시장이 이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확히 짚었습니다”.
이준형은 최시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회의실을 나섰다. 화천강의 실세인 이준형에게 받은 구체적인 호평이었다. 최시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짧게 내뱉은 숨에 열기가 섞여 나왔다.
최시영은 차에 올라 핸들을 잡았다. 강남의 화려한 조명을 뒤로하고 액셀을 밟았다. 문득 로스쿨 1학년 때 가인변론 경연대회에서 만나서 인사를 하고 한번씩 연락했던 고필승이 떠올랐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어렵게 변호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딘가 잘 다니고 있으려나..." 최시영은 가죽 핸들을 쥔 손에 힘을 뺐다. 차창 너머 강남의 불빛이 번졌다.
밤 11시. 사무실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눅눅하게 깔려 있었다. 고필승은 책상 위에 212개의 배송 내역서와 조 소장의 카톡 로그를 펼쳐놓고 있었다. 주머니 속 갤럭시 노트7이 기분 나쁜 열기를 뿜어냈다. 폰을 꺼내 책상 모서리에 두자, 열기에 데워진 종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고필승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숫자를 읊조렸다. "05:17... 05:25... 05:40..." 단순한 숫자였다. 1심 변호사는 이를 '자영업자의 성실함'으로 해석했고, 재판장은 이를 '사업 운영의 흔적'으로 보았다. 퇴근 채비를 하던 차기준이 고필승의 자리 뒤를 지나갔다. 그는 종이 더미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휴대용 탈취제를 허공에 짧게 분사했다.
툭. 차기준이 무심하게 포스트잇 한 장을 고필승의 노트북 옆에 붙였다. 그리고 코트 깃을 세우며 문으로 향했다. 고필승이 멍하니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 사장은 출근을 '인증'하지 않는다. ]
고필승의 숨이 멎었다. 05:17. 박철수가 매일 터미널에 도착해 처음으로 찍은 그 시간. 그것은 단순히 박스를 분류하기 위한 작업 시작 시간이 아니었다. 고필승은 떨리는 손으로 조 소장의 카톡 로그를 다시 뒤졌다.
[조 소장: 박 사장, 오늘 물량 떴네. 05:20까지 확인 완료하고 카톡 줘.]
눈이 번쩍 뜨였다. 05:17분에 찍힌 스캔 기록은 조 소장의 지시 직후에 이루어진 '보고'였다. 사장끼리의 협조라면 일주일에 한 번 정산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박철수는 매일 새벽 5시 17분에 자신의 존재를 기계에 새겨 조 소장에게 바치고 있었다.
"잠깐만요... 이건 사슬이잖아".
고필승은 펜을 들어 조 소장의 지시 시간과 박철수의 스캔 시간을 선으로 잇기 시작했다. 선들이 촘촘해질수록 그것은 거대한 거미줄이 되어 박철수를 옭아매고 있었다. 조 소장의 카톡은 비즈니스 파트너의 조언이 아니었다. 명령을 어기면 곧바로 '패널티'라는 징벌이 떨어지는 군대의 체계였다.
박철수는 사장이 아니었다. 그는 212개의 박스에 묶인 채, 조 소장이 설계한 시계태엽 속에서만 숨 쉴 수 있는 부품이었다.
"됐다". 고필승이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던지듯 놓았다. 밤공기를 가르며 낡은 복사기가 다시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 1심의 견고한 논리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