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의 새벽은 정적보다 먼저 냄새로 왔다. 전날 내린 비가 마르며 올라오는 눅눅한 흙내음, 그리고 봉림상회 셔터가 올라갈 때 나는 쇳소리. 고필승은 사무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목 뒤가 뻐근했다. 책상 위에는 어제 출력한 박철수의 스캔 기록 212장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고필승은 갤럭시 노트7 화면을 켰다. 오전 6시 15분. 주머니에서 열을 뿜어내던 기계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빨간색 볼펜을 들었다. 05:17. 박철수가 조 소장에게 보낸 '보고'의 시간들을 다시 선으로 이었다. 선들은 하나의 거대한 사슬이 되어 종이 위를 가로질렀다.
"밤샜나 보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필승이 정신을 퍼뜩 차려보니 양세리가 출근해 있었다.
그녀는 구김 하나 없는 정장 차림으로 텀블러를 들고 서 있었다. 고필승은 황급히 셔츠 깃을 정리했다.
"아, 선배. 일찍 오셨네요."
"그거, 조 소장 카톡이랑 대조해봤어요?"
양세리가 턱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고필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2페이지를 펼쳤다.
"네. 조 소장이 물량 확인하라고 카톡 보낸 게 05:15분이고, 박 사장님이 스캔 찍은 게 05:17분이에요. 2분 차이입니다. 이건 단순한 협조가 아니에요. 실시간 감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양세리는 아무 말 없이 고필승이 작성한 준비서류 초안을 뒤적여 보았다. 1분간의 정적.
"논리는 맞는데, 서면이 너무 길어요. 판사는 첫 페이지에서 결론이 안 나오면 안 읽습니다."
그녀는 텀블러를 내려놓고 고필승의 노트북 앞에 앉았다.
"3페이지부터 5페이지까지 다 날려요. 숫자로만 보여주라고요. 2분이라는 시간이 박 사장님에게는 '자유'가 아니라 '밧줄'이었다는 거."
양세리는 그 말만 남기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고필승은 날아간 3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보며 입을 벌렸다가, 다시 자판을 두드리지 시작했다. '밧줄'.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전 10시. 사무실 문이 열리며 마봉림이 쟁반을 들고 올라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유자차 네 잔이었다. 마봉림은 법률사무소 직원도 아닌데 제 집 드나들듯 올라왔다. 하기야 건물주님이니….
"아니, 변호사 양반들. 밤낮없이 일만 하면 병나요. 이것 좀 마시고 해요."
마봉림은 고필승의 책상에 찻잔을 놓으며 힐끗 서류를 보았다.
"어제 왔던 그 아저씨 사건이지? 보니까 다리를 아주 많이 절더만. 비 오는 날 계단 오르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녀는 차기준의 책상으로 다가가 찻잔을 툭 내려놓았다. 차기준은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저었다.
"아주머니, 저 당분 있는 거 안 마십니다." "안 죽어요. 좀 마셔요. 사람 몸이 무슨 기계인 줄 아나."
마봉림은 리모컨을 집어 들어 에어컨 온도를 28도로 올렸다. 차기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24도로 내렸다.
"아주머니." "왜, 더워요?" "습합니다." "습하면 차를 마셔야지요. 속이 따뜻해야 겉이 안 축축해집니다."
마봉림은 쟁반을 옆구리에 끼고 내려갔다. 차기준은 밀어냈던 유자차를 5분 후 다시 당겼다. 한 모금 마신 그의 시선이 고
필승이 씨름하던 스캔 기록에 머물렀다.
"고 변호사." "네, 대표님... 아니, 고문님." "이 2분, 조 소장이 박 사장한테 보낸 카톡 답장이 있는지 확인했나?"
고필승이 로그를 뒤졌다.
"없습니다. 박 사장님만 보내고 끝이에요." "그럼 조 소장이 읽었다는 표시, '1'이 사라지는 시간은?"
고필승의 손가락이 멈췄다.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이었다. 그는 박철수가 증거랍시고 넘겨준 USB 속 수천 장의 사진 폴더를 다시 열었다. 배송 완료 후 문 앞에 둔 박스 사진들 사이에, 박철수가 보고 완료를 증명하려고 습관적으로 찍어둔 카톡 스크린샷들이 섞여 있었다.
고필승은 스크린샷 하나를 확대했다. 05:18. 화면 상단 바에 찍힌 시각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시각과 불과 1분 차이. 그런데 화면 속 메시지 옆의 숫자 '1'은 이미 흔적도 없었다.
"읽고도 답을 안 했다는 건, 확인이 곧 '출근 체크'였다는 뜻이지. 사장끼리는 답을 합니다. '오케이' 한 마디라도. 답이 없다는 건 명령 수령 확인이야."
차기준은 다시 태블릿으로 눈을 돌렸다. 고필승은 쪽지에 '1분 내 확인'이라고 휘갈겨 썼다. 사건의 뼈대에 살이 붙는 소리가 들렸다.
화천강의 무채색 밤
같은 시각, 강남 화천강의 회의실. 이준형은 대형 모니터에 띄워진 대기업 'K-네트웍스'의 인력 효율화 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최시영이 그 옆에서 태블릿을 넘기며 보고를 이어갔다.
"지입차주 300명을 개인사업자로 완전히 분리하는 2단계 안입니다. 대리점주 교육 매뉴얼에서 '지시'나 '감독' 같은 단어는 모두 삭제했습니다. '자율'과 '협력'으로 용어를 통일했고요."
최시영의 목소리는 매끄러웠다. 이준형은 화면 속 그래프를 응시하며 짧게 대꾸했다.
"용어는 껍데기일 뿐, 시스템이 강제하면 사람들은 자율이라는 이름의 밧줄을 스스로 목에 걸게 되지. 그게 우리가 설계하는 구조의 핵심이기도 하고."
이준형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최시영을 보았다. 모니터의 푸른 빛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번졌다.
"최 변호사, 이 구조 안에서 '예외'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나?" "패널티 조항을 통해 자동 정산됩니다. 대리점주가 직접 개입할 필요 없이 시스템이 걸러내죠."
최시영은 자신의 보고서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숫자는 정확했고, 논리는 빈틈없었다. 이준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덮었다.
"좋아. 효율 극대화를 추구하는 의뢰인의 생각에 부합하는 방식이야. 최 변호사, 다음 주 의뢰인 이사회 보고까지 이 톤을 유지하도록. "
"알겠습니다."
최시영은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의 창밖으로 강남의 마천루가 보였다. 2016년의 강남은 눈부시게 밝았지만, 그 불빛 아래 선 사람들의 그림자는 길고 차가웠다.
밤 9시, 부암동 로펌 '다시'. 이현 대표가 재킷을 입으며 고필승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 변호사, 이제 퇴근해요. 체호프가 말했죠. 1막에 총이 나오면 3막엔 쏴야 한다고. 우리가 찾은 이 '2분'이 3막의 총이 될 겁니다. 걱정 마요."
"네,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사무실에 혼자 남은 고필승은 창밖을 보았다. 멀리 광화문 방향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준비서면의 첫 문장을 수정했다.
“본 사건의 실체는 212개의 박스가 아니라, 1분마다 갱신되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 있습니다.”
고필승은 문장을 마침표까지 찍고 나서야 펜을 내려놓았다. 진작에 온기를 잃은 머그잔 바닥에는 가라앉은 유자청이 짙게 남아 있었다.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켜자 유자청 특유의 달큰하고 쌉싸름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이 맛이 오늘의 끝이자, 내일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층에서 마봉림이 셔터를 내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암동 골목이 비로소 잠들 준비를 마치는 신호였다. 고필승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두었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고, 1분의 증언이 판사의 마음을 단번에 돌려놓을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가로등 불빛이 오늘따라 유독 촘촘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책상 한쪽, 박철수 씨가 흘리고 간 낡은 목장갑이 스탠드 불빛을 받아 부어오른 손등처럼 뭉툭하게 놓여 있었다. 그 장갑과 자신의 셔츠 소매에 묻은 얼룩이 이제는 흉한 상처가 아니라, 같은 길을 걷는 사람끼리 나눈 조용한 악수처럼 보였다. 고필승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부암동의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내일 아침 터미널로 향할 박철수 씨의 발걸음이 오늘보다는 아주 조금 가벼워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끝. 3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