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앵커를 먼저 놓다

by 조우성 변호사

제3화. 앵커를 먼저 놓다


오전 8시 22분. 최시영 변호사가 로펌 화천강의 14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쌓여 있었다. Apex Materials Inc. — Term Sheet. 로열티 조항 페이지에 빨간 줄 두 개. 어젯밤에 그은 것이다. 2.5%. 숫자 하나가 페이지 중간에 오만하게 앉아 있었다. 시영은 그 숫자를 세 번 보았다.


"왔어요?"


서유진 변호사가 이미 앉아 있었다. 몇 시에 온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 속 서류는 깨끗했다. 그녀는 밑줄을 긋지 않았다. 머릿속에 이미 다 그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걸 시영은 안다.


"네. 브리핑 9시죠." "맞아요." 그게 전부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공기청정기가 무취의 공기를 뱉어내며 아주 낮은 소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전 9시. 소회의실. 이준형 파트너 변호사, 서유진, 최시영. 테이블 위엔 이준형의 커피 한 잔만 놓여 있었다. 90도 직각으로 정렬된 잔의 각도. 어제와 같았다.

"오늘 상대가 먼저 숫자를 던질 겁니다." 이준형이 말했다. "부르게 놔두세요."

잠깐의 침묵. 이준형이 식어가는 커피잔을 응시했다.


"그 숫자가 앵커(Anchor)가 됩니다. 상대가 2.5를 부르는 순간, 게임의 틀은 그들이 짠 2.5 안에 갇히는 겁니다. 우리가 만든 틀이 아닌데도."


서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는 걸 굳이 티 내지 않는 무표정이었다. 시영은 자신도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너무 일찍 끄덕이면 가벼워 보일까 봐 1초를 더 참았다.

이준형이 계속했다. "우리 기술의 대체재는 없습니다. 상대가 서울까지 날아온 이유죠. 7로 시작합니다."


시영이 노트에 숫자를 적었다. 7. 잉크가 번지지 않게 꾹 눌러 썼다.

"영어 주도는 서 변호사가. 최 변호사는 제가 신호 주면 즉각 수치 자료 띄우세요." "알겠습니다."

이준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는 여전히 한 모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 차갑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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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52분. 리셉션. Apex Materials 협상단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수석 협상가 데이비드 크레인(David Krane). 명함을 내미는 속도가 칼날 같았다.


시영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Welcome to Hwacheongang. I'm Siyoung Choi." (화천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최시영입니다.) "Attorney Choi. Nice meeting you." (최 변호사님, 반갑습니다.)

짧고 건조한 악수.


그때 복도 끝에서 서유진이 걸어왔다. 제시카 박(Jessica Park)의 눈썹 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Yujin. It's been a while." (유진, 오랜만이네요.) 서유진이 미소를 지었다. 비즈니스용 미소와는 각도가 달랐다. "Too long, Jessica. You look exactly the same." (너무 오랜만이네요, 제시카. 여전하시네요.)

제시카가 짧게 웃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Liar(거짓말쟁이)."


최시영은 그 교환을 지켜보며 속으로 한 가지를 메모했다. 저 둘은 테이블 밖에서 아는 사이다. 협상이 시작되기 전, 이미 변수 하나가 매설되었다.


오전 10시 30분. 대형 회의실. 테헤란로가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너머는 화창했다. 회의실 안은 대조적으로 서늘했다.


데이비드 크레인이 먼저 서류를 펼쳤다.


"Let me be direct. We propose a royalty rate of 2.5 percent. Given current licensing benchmarks in the materials sector, this reflects fair market value." (직설적으로 말씀드리죠. 저희는 로열티 요율 2.5%를 제안합니다. 소재 분야의 공정 가치를 반영한 수치입니다.)


이준형은 미동도 없었다. 커피잔의 각도를 재는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서유진이 받았다. 서두르지 않았다. 1초를 다 쓰고 입을 열었다.


"We appreciate the directness, Mr. Krane. However, 2.5 is an opening position — not a proposal. The technology in question has no direct equivalent in next-generation process development. Benchmarks from adjacent sectors don't apply here. Our starting point is 7." (직설적으로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레인 씨. 다만 2.5는 오프닝 포지션이지 제안이 아닙니다. 우리가 논의하는 기술은 차세대 공정에서 대체재가 없습니다. 인접 분야 기준은 여기 적용되지 않죠. 저희 시작점은 7입니다.)


제시카 박이 즉각 받아쳤다. "Seven percent is not realistic for a first-generation agreement. We're both taking on market risk here." (7%는 첫 계약치고 비현실적입니다. 우리 모두 리스크를 나눠 갖는 구조니까요.)




서유진이 제시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With respect, Jessica — the risk argument is interesting. If the risk is so significant, why is Apex committing senior counsel to fly to Seoul?" (제시카, 리스크 논리는 흥미롭네요. 그렇게 위험한 거래라면, 왜 Apex는 선임 자문을 서울까지 보낸 거죠?)


제시카가 멈췄다. 0.5초. 그 찰나의 정적을 테이블 위의 모두가 들었다. 데이비드 크레인이 끼어들었다. "We're also proposing an exclusivity clause. Apex as sole licensee for five years. That should factor into any rate discussion." (5년간의 독점권 조항도 제안하겠습니다. 그게 요율 논의의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이준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한국어였다. "독점권과 로열티 요율은 별개의 의제입니다."


서유진이 즉각 영어로 옮겼다. "Exclusivity and royalty rate are separate items on the agenda. We won't be combining them today." (독점권과 로열티 요율은 별개의 의제입니다. 오늘은 섞어서 논의하지 않겠습니다.)

데이비드의 시선이 이준형에게 머물렀다. 이준형은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영은 그 침묵 동안 주머니 속 갤럭시 노트7이 뿜어내는 열기를 느꼈다. 허벅지가 뜨거웠다. 발열 사건 뉴스가 머릿속을 스쳤다. '여기서 터지면 협상은 끝이다.' 시영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인지 배터리 열기인지 모를 뜨거움을 참으며 태블릿 펜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시영의 눈에 데이비드의 손이 들어왔다. 그의 검지가 테이블을 박자 없이 미세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말은 강경한데 손이 불안했다. 시영은 들고 있던 펜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딸깍, 소리가 나지 않게.

제시카 박이 방향을 바꿨다. "If we separate the issues — what's the movement from 7?" (의제를 분리한다면, 7에서 움직일 의향이 있습니까?)


서유진이 이준형을 슬쩍 보았다. 아주 작은 고개의 끄덕임. "The movement is yours to initiate." (먼저 움직여야 하는 건 여러분입니다.)


David Krane이 재무 담당에게 아주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시영은 그 침묵 속에서 다시 허벅지의 열기에 집중했다. 이준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시영은 바지 주머니가 폭발하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최대한 냉철한 표정을 유지했다. 데이비드는 시영의 그 굳은 표정을 '단호한 의지'로 읽은 듯 미간을 좁혔다.

"요율은 재논의하죠. 하지만 독점권은 오늘 결론 내야 합니다." 데이비드의 검지 두드림이 멈췄다.

이준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심 이후에 이어가죠." 그게 전부였다.


복도. Apex 팀이 나간 뒤. 이준형이 복도를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대리석 위로 정확하게 찍혔다. 사라졌다.

서유진이 타이핑을 멈추고 최시영을 봤다. "아까 봤어요? 데이비드 크레인 손." 최시영이 태블릿에서 고개를 들었다. "검지요. 테이블 두드리던 거."

"봤습니다." 서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확인하고 나서 끄덕이는 각도였다. "그 손이 뭘 말하는 것 같았어요?"

시영이 잠시 멈췄다가 답했다. "빈 손으로 돌아가기 싫은 거죠."

서유진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맞아요."


타이핑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시영은 그제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뜨거웠다. 서유진이 휴대폰을 힐끗 보았다. 시영은 태연하게 말했다.

"데이터 연산량이 많아서 그런가 보네요." 서유진이 아무 말 없이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시영은 자신의 허벅지가 아직도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공기청정기 소리만 낮게 돌아갔다.


밤 11시 43분. 사무실이 거의 비어 있었다. 최시영 자리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화면에 파일 두 개가 나란히 열려 있었다.


독점조항_대응논리_서유진.docx 타임스탬프 — 오후 2시 11분.

독점조항_대응논리_최시영.docx 타임스탬프 — 오후 11시 38분.


방향이 달랐다. 서유진의 것은 조건부 수용이었다. 최시영의 것은 완전 거부였다. 시영은 자신의 파일 한 단락을 지웠다. 다시 썼다. 저장했다.


어느 쪽이 이준형의 선택을 받을지는 내일 아침이 되어야 알 수 있었다. 창밖, 테헤란로의 불빛이 2.5%의 로열티보다 훨씬 더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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