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0시 12분. 텅 빈 사무실에 최시영의 그림자만 길게 뻗어 있었다. 통유리 너머 강남의 마천루는 잠들지 않았고, 시영의 책상 위 공기청정기는 무취의 공기를 뱉어내며 낮은 기계음을 유지했다. 화면에 파일 두 개가 나란히 열려 있었다. 서유진의 것, 그리고 자신의 것. 서유진은 독점권 조건부 수용을, 시영은 완전 거부를 주장했다. 이준형 파트너가 어느 쪽을 자신의 영토로 선택할지, 시영은 가늠할 수 없었다. 옆에는 BATNA(협상 결렬 시 대안)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 일본 T사와의 접촉 기록. 로열티율 6.1%. 독점 조항 없음. 의뢰인이 실제로 쥐고 있는 비장의 카드였다. 시영은 'Parallel' 아래에 세 번이나 밑줄을 그었다. 그 단어 하나를 뱉기 위해 거울 앞에서 보낸 4시간의 고독이 그 밑줄에 담겨 있었다.
시영은 노트를 꺼냈다. 어젯밤 서유진이 뱉었던 문장을 한 번 더 훑었다. "The movement is yours to initiate." 0.5초도 걸리지 않고 튀어나온 그 짧은 문장이 시영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영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소리는 공기청정기 소음에 묻힐 만큼 작았다. 시영은 화장실 거울을 보고 혀를 굴렸다. "패럴렐, 패럴렐." 옆 칸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즉시 "패러다임의 변화가..."라며 아는 척 혼잣말을 덧붙였다. 연습이 아니라 이미 영어를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Our client has been in parallel discussions with—" 멈췄다. 혀끝이 미세하게 꼬였다. 시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읊조렸다. "Our client has been in parallel discussions with 두 곳의... 아니, two other potential licensees." 세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시영은 노트 구석에 'R 발음 주의'라고 작게 적었다. 시영은 노트 구석에 'R'뿐만 아니라 'L' 발음 시 혀의 위치도 그렸다. 그는 어젯밤 썼던 5.8% 로열티 계산식보다 혀의 위치도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파트너는 숫자가 아니라 발음에서 품격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냉철한 화천강의 주니어였지만, 속으로는 중학교 시절 성문 기초 영문법을 처음 펼쳤을 때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오전 9시. 이준형 집무실. 두 개의 파일이 출력되어 책상 위에 정렬되어 있었다. 이준형이 서류를 읽는 동안, 사무실 안은 종이 넘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진공 상태가 되었다. 서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건부 수용을 통해 로열티를 6%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장기적인 캐시카우(Cash Cow) 확보에 유리한 구조입니다." 이준형이 페이지를 넘기자 서유진이 덧붙였다. "하버드 협상 세미나의 사례 연구에서도 이 방식이—"
이준형이 서유진의 파일을 덮었다. 탁, 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이준형은 서유진의 효율적인 캐시카우 전략보다, 의뢰인이 5년 동안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할 '독점의 감옥'을 먼저 보았다. 그는 의뢰인의 미래를 팔아 오늘의 로열티를 사지 않았다. 그것이 화천강이 대형 로펌으로 살아남은 진짜 이유였다. "독점권을 내어주는 순간." 이준형이 고개를 들어 서유진을 보았다. "의뢰인의 5년은 정체됩니다. 그게 의뢰인의 영토입니까, 아니면 감옥입니까."
서유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가 이내 굳게 닫혔다. 이준형이 최시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방향으로 갑니다. 오늘 도쿄 수치, 최 변호사가 직접 던지세요. 영어로." "네." 시영은 대답하며 허벅지에 닿은 갤럭시 노트7의 발열을 느꼈다. 어제 외운 문장을 까먹을까 봐 머릿속으로 'Parallel, Parallel...'을 반복하느라 손바닥에 땀이 뱄지만, 표정만큼은 대리석처럼 차가웠다.
오전 11시. 대형 회의실. Apex 팀의 수석 협상가 데이비드 크레인이 서류를 펼쳤다. "We've moved to 3.2 percent. That represents a meaningful concession from our original position." (3.2%까지 양보했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큰 결단을 내린 수치입니다.) 이준형이 시영을 보았다. 시영은 태블릿을 펴며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은 목소리를 냈다. 시영은 검지로 안경 코받침을 정확히 2mm 밀어 올렸다. 이것은 '나는 네 패를 다 읽었다'는 시각적 메시지였다. "Mr. Krane, allow me to share some context." (크레인 씨, 상황 설명을 좀 덧붙여야겠군요.)
서유진이 아닌 시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제시카 박의 눈이 커졌다. "Our client has been in parallel discussions with 두 곳... 아니, two other potential licensees. One of them is Tokyo-based. Their current offer stands at 6.1 percent — with no exclusivity requirement." (저희 의뢰인은 현재 두 곳의 잠재 라이선시와 병행 협의 중입니다. 그중 한 곳은 도쿄 소재 기업이며, 조건은 6.1%에 독점권 조항 없음입니다.) '두 곳'이라는 한국어가 튀어나온 순간 시영은 0.1초 만에 뇌를 풀가동했다. 그는 일부러 제시카를 빤히 쳐다보며 'Two'라고 다시 말했다. 마치 한국어를 모르는 제시카를 위해 친히 번역해준 듯한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Is that a formal offer currently on the table?" (현재 유효한 공식 제안입니까?) 제시카의 질문에 서유진이 차갑게 받았다. "It's the alternative our client is obligated to consider." (협상이 생산적이지 못할 경우 의뢰인이 당연히 검토해야 할 대안입니다.)
복도. 휴식. 서유진과 최시영이 나란히 창가에 섰다. 제시카 박이 물 세 잔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제시카는 적군인 서유진에게 물을 건넸다. 비록 테이블 위에서는 피 튀기게 싸웠지만, 복도에서는 같은 시대를 버티는 여성 변호사로서의 연대감이 짧게 스쳤다. "You were always like this. Even back at Harvard." (유진, 당신은 항상 이랬죠. 하버드 때도 늘 한 발 앞서 있었고요.) 제시카가 서유진에게 물을 건네며 낮게 속삭였다. 서유진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You weren't far behind." (당신도 만만치 않았잖아요.)
제시카가 짧게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최시영이 물컵을 들고 그 뒷모습을 보았다. "하버드 시절 패턴을 아는 사람이군요. 그래서 어제 멈춘 거였습니까?" "제시카는 논리보다 관계의 틈을 파고드는 스타일이니까요." 서유진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유진은 시영을 보지 않고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전략이 기각된 패배감보다, 동료가 던진 수가 승리를 이끌어냈음을 먼저 인정했다. 화천강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가장 차갑고도 뜨거운 동료애였다. "오늘 최 변호사가 먼저 던진 건... 유효했어요." 칭찬이라기엔 너무 건조했지만, 시영은 그것이 서유진식 인정임을 알았다.
Apex 팀 복귀. 데이비드 크레인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상체가 테이블 쪽으로 쏠려 있었다. 수세에 몰린 자의 각도였다. "We can do 5.5. And we'll remove the exclusivity clause entirely." (5.5%로 가죠. 독점 조항은 완전히 삭제하겠습니다.) 이준형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서유진이 마무리를 지었다. "5.8. And we have an agreement." (5.8%면 합의하죠.) 데이비드와 이준형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만났다. 악수가 끝나고 서류에 잉크가 스몄다. 서명이 끝나고 만년필 잉크가 종이 조직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 소리는 화천강의 32층에서는 들리지 않았지만, 시영의 가슴 속에서는 폭죽처럼 터졌다. 5.8%는 이제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약속이 되었다.
같은 날. 부암동. 오후 4시. 봉림상회 셔터가 절반쯤 내려와 있었다. 고필승은 에어컨 제습 모드 버튼을 눌렀지만, 리모컨 건전지가 다 됐는지 반응이 없었다. 그는 서류로 부채질을 하다가 서류가 눅눅해서 얼굴에 착 달라붙자 "이야, 밀착 변론이네"라며 혼자 실없이 웃었다. 마봉림 아주머니는 카운터에 기대어 '복면가왕' 재방송을 틀어둔 채였다. 가게 안에는 명랑핫도그에서 풍겨 나오는 달큰하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가득했다. 마봉림은 핫도그 설탕을 묻히며 위층을 향해 소리쳤다. "변호사님들, 설탕 떨어진 거 아니지? 내가 이 집 복은 다 설탕으로 잡아두고 있응게!" 차기준은 위에서 "종이 끈적거려요..."라고 아주 작게 쪽지를 써서 창밖으로 내밀려다 참았다.
계단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렸다. 절뚝거리는 박철수의 것과는 다른, 가볍지만 끝이 무거운 소리였다. 위층, 법률사무소 '다시'. 고필승이 서류 더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렸다. 서른 후반의 여자가 서 있었다. 얼굴에는 오래된 장마처럼 눅눅한 피로가 배어 있었다. 여자의 손등은 거칠게 트여 있었고, 두 손으로 꽉 쥔 에코백 끈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했다. 가방 모서리에는 지워지지 않은 얼룩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고필승은 여자가 쥔 에코백의 얼룩을 보고 그녀가 걸어온 먼 길을 짐작했다. 그는 눅눅한 서류 대신 깨끗한 손수건을 먼저 내밀려다 멈췄다. 대신 의자를 깊게 당겨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여자가 입을 떼기도 전, 아래층에서 마봉림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올라왔다. 마봉림은 핫도그를 튀기며 올라오는 손님의 피로를 냄새로 먼저 알아챘다. 그녀는 설탕을 듬뿍 묻힌 핫도그 하나를 포장지에 싸서 카운터 구석에 두었다. "들어오세요! 거기 서 있으면 복 달아나요. 안 물어요! 이거 묵고 기운 차려야제." 여자가 멈칫하다 한 발을 들였다. 부암동 골목의 따뜻한 공기가 여자의 등 뒤를 밀었다.
화천강. 저녁. 이준형 파트너가 복도를 지나가다 멈춰 섰다. 최시영을 보았다. "좋았어요." "좋았어요"라는 말은 이준형의 사전에서 '당신은 이제 화천강의 부품이 아니라 엔진이다'라는 뜻이었다. 그는 시영의 어깨를 치지 않았고 미소 짓지 않았지만, 그 말 한마디로 시영의 밤샘 피로를 모두 가져갔다.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준형이 가고 나서 시영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는 복도 벽에 귀를 대고 이준형의 구두 소리를 다시 분석했다. "좋.았.어.요." 네 음절의 박자가 정확했다. 시영은 혼자 복도에서 '파트너 승급 1단계 완료'라며 쉐도우 복싱을 했다. 옆에 서 있던 서유진이 가방을 챙기며 낮게 말했다. "저 말 듣는 거, 나 화천강 들어와서 여섯 달 만에 처음이에요." 시영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칭찬의 무게가 5.8%의 로열티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은 시영은 노트북 대신 노트를 펼쳤다. 어젯밤 써두었던 영어 문장 아래, 오늘 자신이 직접 뱉은 말을 적어 넣었다. 시영은 오늘 뱉은 문장 옆에 날짜와 '완료'라고 적었다. 그것은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자신이 넘어야 했던 열등감의 마침표였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테헤란로의 불빛을 향해 아주 작게 목례했다. 'Our client has been in parallel discussions...' 노트를 덮었다. 창밖 테헤란로의 불빛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시영의 주머니 속 노트7은 비로소 열기를 식힌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시영은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오늘 하루 고생한 기기에게도 휴식을 주고 싶었다. 차가워진 기기의 표면이 시영의 손바닥에 닿았다. 폭발하지 않고 버텨준 것이 꼭 자기 자신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