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43분. 서울 어딘가의 콜센터. 형광등 빛이 수평으로 깔렸다. 창문이 없었다. 이십여 개의 헤드셋이 귀에 걸린 채 여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시계는 모니터 오른쪽 상단에만 있었다. 류미나의 화면엔 숫자 하나가 박혀 있었다. 오늘 목표 80건. 현재 47건. 모니터 상단에 코팅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골드 등급 이상 고객 — 대기 없이 즉시 연결.」
다음 수신을 기다렸다. 스크립트가 화면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T-One 골드 전담 류미나 상담원입니다.' 번호 하나가 떴다. 류미나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일 초. 이 초. 연결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T-One 골드 전담—" 이어폰을 뺐다. 조용히. 일어섰다. 뒤에서 팀장이 뭐라고 불렀다. 사물함에서 가방을 꺼냈다. 이어폰을 가방 안에 넣었다. 귀에 끼지 않은 채로 문을 밀었다.
부암동 오르막길이 가팔랐다. 담쟁이가 성큼성큼 올라간 붉은 벽돌 건물 2층에 희미한 전구 빛이 켜져 있었다. 고필승이 복사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기계 옆면을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셔츠 소매에 토너 자국이 있었다. "손님 왔어요." 양세리가 텀블러를 들고 자기 자리에서 건조하게 말했다. 고필승이 벌떡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 검지에 까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을 거뒀다. 왼손을 내밀었다가, 그것도 이상한 것 같아 결국 가볍게 목례를 했다.
류미나가 고개를 숙였다. 고필승은 당황하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고필승이 "아, 와이파이가 좀 느리죠? 부암동이 좀 이래요."라며 주머니에서 하얀 조약돌 같은 '와이파이 도시락(에그)'을 꺼내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2016년 해외 출장자들의 필수품이자 얼리어답터의 상징인 물건이었다. 하지만 흔들던 에그에서 빨간 불이 비침하게 깜빡였다. 배터리가 없다는 신호였다. "이게 2016년의 최첨단인데..."라며 고필승이 충전기에 선을 꽂으려다 발에 꼬여 휘청였다. 커피잔을 칠 뻔한 아슬아슬한 몸짓에 류미나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이현이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 찻잔이 탁자 위에 놓였다. 류미나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앉았다. 이현이 맞은편에. 고필승이 노트를 펴고 옆에. 양세리가 그 옆에 메모지를 꺼내 앉았다. 이현이 먼저 말했다. "처음부터 말씀해 주세요. 전부 다요 ." 류미나가 탁자를 봤다. 이현을 봤다. 찻잔을 봤다.
"7년 됐어요. 2009년부터요 ." VIP 전담팀으로 배치된 건 2년 전이었다. 골드 등급 고객 전담. 월급이 3만 원 더 나왔다. 특정 고객의 전화는 월 두세 번이었다. 항상 같은 번호였다. 처음엔 단순 요금 문의였다. 거기서 류미나가 멈췄다. 가방 끈을 쥐었다가 놓았다.
류미나가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 고필승은 관련 판례를 검색하려 스마트폰을 만졌다. 긴장한 탓에 손가락이 미끄러져 화면 속 카카오톡 유료 이모티콘 구매 페이지의 '결제' 버튼을 눌러버렸다. '결제 완료' 알람이 떴다. 당황한 고필승이 핸드폰을 급히 뒤집어 놓았지만, 하필 벨소리가 켜져 있었다. "라이온!" 하는 웅장한 효과음이 조용한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2016년 전국을 강타한 그 사자의 포효였다. 양세리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건조하게 뱉었다. "290원, 고 변호사님 이번 달 월급에서 깔까요?" 류미나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팀장한테 말했어요. 두 번. 그 고객 연결을 끊어달라고요." 류미나의 목소리가 다시 평탄해졌다. "팀장이 그러더라고요. '그분 골드 고객이에요. 그냥 넘기세요.'" 고필승은 볼펜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 시작했다. '딸깍, 딸깍.' 일정한 리듬이었다. 류미나가 숨을 고르면 딸깍임도 멈췄고, 그녀가 말을 이어가면 다시 일정한 박자로 소리가 났다. 류미나는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말을 경청하며 박자를 맞춰주는 지휘봉처럼 느껴졌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던 7년의 무게가 그 작은 리듬에 실려 조금씩 흘러나왔다.
6개월 뒤 다시 보고했다. 이번엔 서면으로. 반려됐다. 이유는 없었다. 반려 도장이 찍혔다. 갱신 시즌이 왔다. 11명 중 류미나만 통보를 못 받았다. "통보를 못 받은 게 아니에요. 비갱신 통보를 받은 거예요 ." 양세리가 물었다. "통보 날짜가 언제예요 ?" "보고서 반려되고 14일 뒤요 ." 양세리가 고필승을 봤다. 고필승이 노트에서 눈을 들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류미나가 말했다. "제가 왜 이걸 이렇게 오래 참았는지 모르겠어요 ." 잠깐 멈췄다. 류미나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고필승이 볼펜 뚜껑을 끼웠다. 뺐다. 다시 끼웠다. 서류를 가지런히 정렬했다. 정렬할 이유가 없는데. 양세리가 잠시 류미나를 보고 있다가 조용히 물었다. "녹취 있어요 ?" 류미나가 핸드폰을 꺼냈다. 파일 하나를 눌러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양세리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고필승은 그걸 보았다. 류미나를 보는 양세리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도.
면담이 끝나고 이현이 복도에서 고필승에게 말했다. "7년이면 긴 시간이에요. 그 시간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게 뭔가 있는 거거든요, 항상 ."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현은 방으로 들어가 전등을 켜지 않은 채 책상 앞에 앉았다. 창밖 부암동 골목의 흐릿한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어깨에 길게 내려앉았다. 그는 아까 류미나가 차마 뱉지 못하고 삼킨 말들, 가방 끈을 으스러지게 쥐던 하얀 손가락의 떨림을 어둠 속에서 복기했다. "7년..." 그가 아주 작게,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변호사의 방에 무거운 침묵이 고였다.
고필승이 복도에 잠깐 서 있었다. 오후 다섯 시. 봉림상회. 오징어 굽는 냄새가 골목으로 새어나왔다. TV에서 복면가왕이 흘러나왔다. 복면을 쓴 참가자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 마봉림이 뒤집개를 들고 TV를 봤다. "저 사람 목소리 어디서 들어봤는데 ." 차기준이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보면 알겠죠 ." "아, 그게 안 보이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마봉림이 덥다며 에어컨 리모컨을 집어 28도로 올렸다. 차기준이 "습합니다 ."라며 26도로 내렸다. 마봉림이 다시 28도로. 차기준이 26도로. 리모컨이 탁자 위를 두 번 왔다 갔다 할 때, 고필승이 내려와 말없이 '제습' 버튼을 눌렀다. "습해서요." 두 고수의 대결이 하수의 무심한 손가락 하나에 종결됐다. 고필승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내밀어주는 오징어 다리를 받아 들었다. 고필승이 받아 들고 계단을 올랐다. 한 조각, 두 조각. 세 번째에서 계단이 끝났다.
류미나가 나간 자리, 마봉림이 카운터로 돌아갔다. 마봉림은 수십 번 빨아 끝이 해진 낡은 수건을 꺼냈다. 그녀는 류미나가 한참 동안 앉아 있던 의자와 탁자를 오래도록, 아주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마치 그곳에 남겨진 상담원의 축축한 한숨과 억울한 공기까지 뽀득뽀득 닦아내려는 것처럼. 낡은 수건 위로 노란 유자차 향이 배어들었다.
밤. 사무실. 고필승이 남녀고용평등법 조문을 화면에 띄워놓고 있었다. 양세리가 이미 먼저 보고 있었다. "선배, 혹시 2016년에 고객이 성희롱을 하면 회사가 의무적으로..." "없어요 ." 고필승이 한 박자 멈췄다. "없다고요?" "분리조치 의무 조항이요." 양세리가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회사가 피해 직원을 그 고객으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거. 2018년에 생겼어요. 지금은 없어요 ." 고필승이 화면을 봤다. 법조문. 2조. 14조. 그리고 빈자리. "그럼 1심이 맞는 거예요?" 양세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이현 대표가 서류를 들고 지나가다 두 사람을 봤다. 멈추지 않았다. "이거 재미있네요 ."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고필승이 양세리를 봤다. 양세리가 모니터를 봤다. 고필승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자료를 올리려 전자소송 사이트에 접속했다. 갑자기 모니터에 액티브X 보안 프로그램 설치 창이 10개쯤 동시에 떴다. 하나를 깔면 브라우저가 꺼지고, 다시 켜면 다른 보안 프로그램이 길을 막았다. 2016년의 가혹한 인터넷 환경이었다. 고필승이 모니터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제발, 한 번만... 키보드 보안만이라도...!" 창밖 어둠 속에서 길고양이가 그 처절한 기도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지나갔다.
양세리가 잠깐 고필승을 봤다가 다시 화면을 봤다. "판례를 찾아봐요. 법이 없을 때 판사들이 어떻게 판단했는지 ." 밤 11시. 사무실에 고필승만 남았다. 검색창에 키워드를 쳤다. 안전배려의무. 성희롱. 고객. 신의칙. 결과들이 쌓였다. 동료였다. 상급자였다. 고객이 아니었다. 검색어를 바꿨다. 또 바꿨다. 그러다 하나를 발견했다. 선고일 2014년. 고등법원. 고필승이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읽었다. 다시 읽었다.
책상 한쪽에서 차기준의 낡은 노트가 보였다. 고필승이 조심스럽게 노트를 넘겼다. 2011년 날짜가 찍힌 메모였다. '사람의 목소리는 단순한 증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이다.'라는 문장 위에 투박하고 거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차기준이 판사 자격을 잃기 전, 법정에서 만난 수많은 목소리를 새기며 그어 내린 선이었다. 고필승은 그 뜨거운 밑줄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얹어보았다.
출력 버튼을 눌렀다. 복사기가 비명을 질렀다. 종이가 걸렸다. 고필승이 복사기를 열었다. 잡아당겼다. 반쪽이 찢겼다. 찢어진 반쪽을 펼쳐 들었다. 판결 요지가 절반쯤 보였다. 나머지가 기계 안에 있었다. 고필승이 찢어진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고필승은 복사기 안에서 찢어진 나머지 조각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는 퍼즐을 맞추듯 책상 위에 종이 조각들을 펼쳤다. '찌익, 찌익.' 투명 테이프를 뜯는 소리가 조용한 밤 공기를 가늘게 갈랐다. 한 줄, 한 줄 어긋난 문장을 이어 붙일 때마다 류미나의 부서진 7년이 함께 붙여지는 것 같았다. 다 붙여진 쭈글쭈글한 종이 위로 창밖의 창백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고필승은 그 조각난 권리들을 꽉 쥐었다.
그리고 복사기 뚜껑을 다시 열었다. 고필승이 사무실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부암동 골목의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버스 정류장 저 멀리, 류미나와 닮은 작고 외로운 뒷모습이 막차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고필승은 버스의 뒷불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옆구리에 낀 서류 가방 지퍼를 다시 한번 꽉 닫으려 힘을 주었다. 이번엔, 딸깍 소리를 내며 제대로 잠겼다. 고필승이 오르막길을 내려갔다. 부암동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