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다시 사무실.
고필승이 어제 찢어진 판례를 테이프로 이어 붙여놓고 있었다. 양세리가 출근하다 그걸 보고 멈췄다.
"그게 뭐예요."
"판례요. 복사기가..."
양세리가 더 묻지 않았다. 텀블러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고필승이 테이프로 이은 판례를 내밀었다.
"2014년 고등법원이에요. 고객에 의한 반복적 성적 언동. 회사가 알면서도 아무 조치를 안 했어요. 법원이 안전배려의무 위반을 인정했어요."
양세리가 받아 읽었다. 다 읽는 데 2분 걸렸다. 판례를 고필승에게 돌려줬다.
"고등법원이에요."
"네."
"대법원 아니고요."
"...네."
양세리가 텀블러 뚜껑을 열었다.
"쓸 수는 있어요."
그게 전부였다.
고필승이 노트에 두 개를 적었다. 카드 하나. 성희롱 녹취 파일 — 류미나가 이미 제출했다. 카드 둘. 갱신기대권 — 11명 중 10명이 갱신됐다는 사실. 그 사실을 증명할 회사 내부 자료가 없었다.
고필승은 서류를 정렬할 필요가 없는데도 책상 바닥에 툭툭 치며 끝단을 완벽하게 맞췄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어제 밤늦도록 판례를 이어 붙이며 묻은 끈적한 테이프 자국이 훈장처럼 남아 있었다. 그 서투른 손가락의 움직임은 류미나의 찢겨나간 고통을 어떻게든 매끄럽게 정리해주고 싶은 고필승의 조용한 고집이었다.
고필승이 노트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법이 없으면 판례가 있다."
양세리가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판례가 있으면 증거가 있어야 해요."
사흘 뒤. 법원 소법정. 출발 전, 고필승은 법원 앞에서 새로 나온 카카오택시 앱을 켜고 "호출 중"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바로 앞 도로에 빈 택시가 수두룩하게 지나갔지만, 고필승은 앱의 지시를 기다리느라 손을 들지 않았다. 결국 양세리가 한숨을 내쉬며 직접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아세우자, 고필승은 "앱이... 배신했네요"라며 취소 수수료 걱정 어린 얼굴로 올라탔다.
법원의 형광등이 웅웅거렸다. 방청석 없이 재판부, 원고 대리인석, 피고 대리인석만 있는 작은 방이었다. 고필승이 서류를 정리하는데 문이 열렸다. 오승전이 들어왔다. 나이는 마흔 중반쯤이었다. 수트가 단정했다. 넥타이가 정확히 매어져 있었다. 서류 묶음을 들고 자리에 앉으며 고필승을 한 번 봤다. 한 번만. 그리고 자기 서류를 정리했다.
고필승이 양세리에게 낮게 물었다. "저 사람이에요?"
"오승전 변호사. '로펌 마키아'예요."
"어떤 사람이에요?"
양세리가 고필승을 봤다가 다시 서류를 봤다.
"이기는 걸 일로 하는 사람이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재판장이 들어왔다. 법정 들어가기 직전, 양세리가 핸드폰 이어폰을 꽂으려다 잠깐 멈췄다. 구멍이 없었다. 아이폰7이었다. 표정 변화 없이 이어폰을 가방에 넣었다. 고필승이 그걸 보고 안타까운 듯 주머니에서 잔뜩 꼬인 유선 이어폰을 꺼내 내밀었다. "선배, 제 거라도 쓰실래요? 전... 구멍 있는 구형이라". 양세리는 고필승의 귓밥이 묻은 이어폰 솜을 물끄러미 보더니 "제 고막은 소중해서요"라고 짧게 답하며 돌아섰다. 고필승이 머쓱하게 자기 이어폰을 다시 챙겼다. 양세리가 먼저 법정으로 들어갔다.
고필승이 신청서를 읽었다.
"원고는 상대방 회사가 보유한 VIP 고객 관리 지침서, 내부 민원 접수 대장, 류미나 상담원의 계약 갱신 심의 회의록에 대한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합니다. 이 문서들이 있어야 회사가 피해 사실을 알고도 아무것도 안 했는지, 갱신 거부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재판장이 오승전을 봤다.
오승전이 서류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해당 자료들은 영업 비밀에 해당합니다. 소송과의 관련성도 불분명하고요. 특히 고객 관리 지침은 원청사인 T-One텔레콤의 운영 자산입니다. 피고 한텔CS는 그 지침을 위탁받아 이행한 것에 불과합니다".
고필승이 바로 받았다.
"위탁받아 이행하는 동안 해당 고객의 통화가 이뤄졌고, 피해 신고가 접수됐고, 그 신고를 반려한 건 한텔CS 팀장입니다. 위탁이라는 구조가 보호 의무를 소멸시키지는 않습니다".
오승전이 재판장을 보았다. 고필승을 보지 않았다.
"원청사의 지침에 따른 운영입니다. 피고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된 사안이 아닙니다".
재판장이 잠깐 생각했다.
"양측 의견 확인했습니다. 제출 거부 이유를 서면으로 제출하십시오. 다음 기일에 제출 허부를 판단하겠습니다".
서류를 덮었다.
심문이 끝났다. 법정 밖 복도. 오승전이 먼저 나와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고필승이 나오다 마주쳤다.
오승전이 고필승을 봤다. 먼저 말했다.
"문서 제출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알죠". 고필승이 말했다. "거부하면 법원이 우리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오승전이 잠깐 고필승을 봤다.
"그 전에 우리가 가진 게 더 있어요".
더 말하지 않았다. 가방을 들고 복도를 걸어갔다. 오승전은 뒤돌아보지 않고 걷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는 방금 전 고필승이 법정에서 내밀었던, 테이프로 덕지덕지 이어 붙인 판례 서류의 쭈글쭈글한 질감을 떠올렸다. 오승전은 자신의 매끈한 가죽 서류 가방을 꽉 쥐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지독하네, 부암동". 그의 낮은 목소리에는 조롱 대신 기묘한 존중이 섞여 있었다.
고필승이 그 뒷모습을 봤다. 양세리가 옆에 왔다.
"저게 무슨 뜻이에요?"
"외주 구조 얘기 나올 거예요". 양세리가 복도 끝을 봤다. "한텔CS가 아니라 T-One이 시킨 거라고. 책임을 올릴수록 잡기 어려워지는 구조를 만드는 거예요".
고필승이 오승전이 사라진 방향을 봤다.
그날 오후. 봉림상회.
류미나가 서류를 받으러 다시에 들렀다가 내려오는 길에 마봉림이 문 앞에서 불렀다.
"차 한 잔 하고 가요".
류미나가 들어갔다.
마봉림이 차를 내왔다. 둘 다 말이 없었다. 봉림상회 특유의 묵은 나무 냄새가 차 향과 섞였다.
한참 후 마봉림이 물었다.
"일은 어떤 일 하셨어요?"
"콜센터요".
"아, 전화 받는".
"네".
마봉림이 카운터를 닦으며 말했다.
"저도 전화를 엄청 많이 했어요. 옛날에. 이 건물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류미나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근데 어느 날은요. 상대방이 저한테 '당신 목소리가 밥맛이다'고 그러더라고요".
류미나가 마봉림을 봤다.
"그래서요?"
"그래서 저도 그랬어요. 그럼 당신 목소리는 밥상을 엎어버린다고".
류미나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마봉림은 류미나가 웃는 동안 카운터 너머로 그녀의 메마른 손등 위로 따스한 유자차 김이 하얗게 서리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마봉림이 카운터를 계속 닦으며 나직이 덧붙였다. "목소리가 밥줄인 사람은 말이야, 목소리가 곧 자기 집이기도 한 거야". 류미나의 웃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마봉림이 계속 카운터를 닦았다. 더 말이 없었다.
저녁. 사무실.
양세리가 류미나와 별도 통화한 내용을 정리해왔다. 카카오톡 메시지 스크린샷들. 서면 보고서 반려 원본. 류미나가 혼자 남겨두었던 것들이었다.
"이거, 고 변호사한테 말 안 한 게 더 있어요".
고필승이 파일을 봤다. 묻지 않았다.
갱신기대권 증거를 정리했다. 7년 근속. 1년 단위로 7회 갱신. 동료 11명 중 갱신된 사람 10명. 비갱신 통보 날짜는 보고서 반려 후 14일 뒤.
"이게 있으면 돼요?" 고필승이 물었다.
"있어야 돼요" 양세리가 말했다.
차기준이 사무실을 나가려다 태블릿을 고필승 책상에 내려놓았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판례 검색 결과였다. 고필승이 올려다봤을 때 차기준은 이미 코트를 들고 있었다. "T-One 지침서 관련이에요". 차기준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나갔다. 화면에는 T-One 지침서의 위법성을 다룬 아주 오래된 판례 하나가 정중앙에 띄워져 있었다. 차기준은 이 판례를 찾기 위해 어제 밤부터 무선 인터넷 신호가 가장 잘 잡히는 창가 자리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차기준이 스쳐 지나간 자리, 그의 코트 깃에는 부암동의 차가운 밤 안개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법원 복도.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류미나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심문기일이 끝난 직후였다.
고필승과 양세리가 서류를 챙기며 나왔다.
류미나가 가방에 손을 넣었다. 이어폰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잠깐 바라봤다. 그냥 바라봤다. 다시 가방에 넣었다. 고필승이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세리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셋이 나란히 법원을 나왔다. 가을 햇살이 법원 담벼락을 길고 비스듬하게 비추고 있었다. 고필승은 자기 그림자가 류미나의 그림자와 슬쩍 겹쳐지도록 보폭을 천천히 맞췄다. 그는 류미나에게 그 어떤 거창한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뒤에서 묵묵히 보폭을 죽여 걷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그녀의 목소리를 지키는 방패가 되겠다는 다짐을 온몸으로 전하고 있었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가을 햇살이 계단 위로 길게 뻗었다. 아무도 그걸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