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아홉 시. 다시 사무실. 고필승이 서류 가방을 열어놓고 체크리스트를 확인했다. USB. 녹취 파일. 있다. 갱신 통보 날짜 비교표. 있다. 판례 — 테이프로 이어 붙인 것. 있다.
양세리가 코트 단추를 잠그며 봤다. 고필승이 비장하게 가방을 챙기다 말고 고개를 들어 양세리를 보았다. "선배, 오늘 재판... 우리 이길 수 있겠죠? ㅇㅈ(인정)?" 2016년 로스쿨 후배들에게 유행한다는 신조어를 섞어보았지만, 양세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추를 마저 채우며 답했다. "ㄴㄴ(노노). 다시 써오기나 하세요." 양세리가 먼저 문을 나서자, 고필승은 "아, 요즘 애들 말 쓰면 좀 친해질 줄 알았는데..."라며 뒷머리를 긁적이며 혼자 무안해했다.
"세 개 다 쓸 수 있으면 좋겠네요." "다 써야죠." 양세리가 코트 깃을 세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대꾸였다. 그때 마봉림이 아래층에서 올라와 고필승의 양복 주머니에 뭔가를 슥 찔러 넣어주었다. "이게 말이야, 내가 10년 전 재판 이길 때 가졌던 행운의 동전이야. 꼭 이기고 와." 고필승이 주머니에서 꺼내 보니 2016년엔 이미 거리에서 사라진 낡고 붉은 버스 토큰이었다. 창가에 서 있던 차기준이 밖을 보던 채로 한마디 던졌다. "그건 행운이 아니라 박물관 기증용이군요". 마봉림이 차기준을 째릿 노려보았지만, 차기준은 대꾸 없이 책상 위에 쪽지 하나를 더 올려두었다.
[ 녹취는 틀어라. 설명하지 말고. ]
고필승은 차기준의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쪽지를 반듯하게 네 번 정성스럽게 접었다. 그리고 심장과 가장 가까운 왼쪽 재킷 안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손끝에 닿는 쪽지의 거친 종이 질감에서, 고필승은 이것이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선배가 대신 짊어준 7년의 무게임을 느꼈다. 가방 지퍼를 닫으려다 걸렸다. 당겼다. 또 걸렸다. 가방을 바닥에 놓고 양손으로 잡아당기자 세 번째에 잠겼다. 양세리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법원 소법정 안. 형광등이 웅웅거렸다. 창이 없었다. 고필승이 법원 입구 보안 검색대를 통과할 때, 보안 요원이 그의 핸드폰을 보더니 "이거 갤럭시 노트7 아닙니까? 기내 반입도 안 되는 건데..."라며 난감해했다. 고필승은 "이거 충전 60% 제한 업데이트해서 괜찮습니다!"라며 당당하게 외치지만, 하필 그 순간 폰이 뜨거워지자 화들짝 놀라며 주머니에서 꺼내 멀찍이 들었다.
오승전이 자리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고필승이 들어오자 한 번 봤다. 한 번만. 그리고 서류를 봤다. 재판장이 들어왔다. "오늘 변론에서 쌍방 최종 주장을 듣겠습니다." 오승전이 일어섰다. "피고 한텔CS는 원청사 T-One텔레콤의 운영 지침을 이행한 외주 업체입니다. 고객 관리 권한은 원청사에 귀속되어 있으며, 피고에게는 특정 고객의 연결을 차단하거나 거부할 독립적 권한이 없었습니다. 원고의 신고에 대한 팀장의 대응 역시 지침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피고의 독자적 의사결정으로 볼 수 없습니다".
재판장이 고필승을 봤다. 고필승이 일어섰다. 서류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지침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 대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피해 신고를 묵살하라는 내용이 그 지침에 포함되어 있다는 건가요". 오승전이 받았다. "팀장이 고객 관리 우선순위에 따라 자체적으로 판단한 겁니다". "VIP 고객 관리가 피해 신고보다 우선이라는 게 T-One의 공식 방침이라면, 그 지침서를 이 법정에 제출하시면 됩니다. 피고 측은 앞서 문서제출명령에 영업 비밀을 이유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거부하면 법원이 우리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침서 없이는 피고 측 주장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단순화된 논리입니다. 외주 계약의 법적 구조는—" "구조 얘기라면 저도 하겠습니다." 고필승이 재판장을 봤다. "한텔CS 팀장이 류미나 상담원의 신고를 직접 받았습니다. 반려 도장을 찍은 것도 팀장입니다. 원청사 지침이 어떻든, 신고서에 도장을 찍은 손은 피고 측 것입니다".
재판장이 기록했다. 오승전이 입을 다물었다. 고필승이 USB를 꺼냈다. "원고 측이 제출한 음성 파일의 재생을 신청합니다". 오승전이 일어섰다. "해당 녹음의 취득 경위와 당사자 동의 여부가 불분명합니다". "콜센터 업무 통화입니다. 원고가 자신의 업무 중 직접 보관한 파일입니다. 피해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저장해온 것이고, 통화의 당사자는 원고 본인입니다". 재판장이 잠깐 검토했다. "재생을 허가합니다". USB가 법원 시스템에 연결됐다.
방청석. 류미나가 앉아 있었다. 재생 버튼. 스피커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자 류미나는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손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지만, 그녀의 등은 화살처럼 꼿꼿했다. 그녀는 이제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지키는 목격자로 서 있었다. 소리가 흘러나왔다. 류미나가 정면을 봤다. 움직이지 않았다. 류미나의 손이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재판장이 메모를 하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재판장은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재생되는 소리 자체에 귀를 기울였다. 법적인 구성 요건을 따지는 '판사'가 아니라, 한 인간의 억울함을 듣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가 다시 펜을 잡았을 때, 펜을 쥔 손에 이전보다 더 많은 힘이 실렸다. 오승전이 정면을 봤다. 법정 안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재생이 끝났다. 침묵이 이어졌다.
고필승이 서류를 들었다. "이 통화는 2014년 9월부터 2016년 1월까지 총 열다섯 회 기록됩니다. 원고는 이 중 여섯 회를 팀장에게 서면으로 신고했습니다. 회사의 조치는 없었습니다". 재판장이 기록했다. 오승전이 정면을 봤다. 반박하지 않았다. 고필승이 다음 서류를 들었다. "원고는 2009년부터 2016년까지 1년 단위로 총 일곱 차례 계약이 갱신됐습니다. 같은 팀 동료 열한 명 중 이번 갱신 시즌에 갱신되지 않은 사람은 원고 단 한 명입니다". 재판장이 피고 측을 봤다. "피고 측, 원고만 비갱신된 구체적 사유를 설명하십시오".
오승전이 일어섰다. "갱신 여부는 회사의 인사 재량 범위에 속하는 사항으로서, 업무 수행 능력 및 적합성에 대한 종합적 평가에 따른 것입니다". "종합적 평가." 고필승이 받았다. "열한 명 중 열 명이 갱신됐습니다. 이분만 갱신이 거부됐어요. 그 평가에서 이분이 받은 점수와 나머지 열 명의 점수가 어떻게 달랐는지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오승전이 말을 골랐다. 그 시간이 짧지 않았다. "개인별 평가 결과는 인사 기밀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그 평가 결과를 이 법정에 제출하시면 됩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필승이 마지막 서류를 꺼냈다. 테이프로 이어 붙인 판례였다. "2014년 ○○고등법원 판결입니다. 사용자가 고객에 의한 반복적 피해를 인지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경우, 이는 신의칙상 안전배려의무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시했습니다. 2016년 당시 명문 조항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판례는 있었습니다". 재판장이 판례를 받아들었다. 번호를 메모했다. 오승전이 이의를 제기하려다 멈췄다. 잠깐. 그리고 앉았다. 재판장이 선언했다. "변론을 종결합니다. 선고 기일은 추후 고지하겠습니다".
법원 계단. 고필승과 양세리가 나왔다. 류미나가 뒤에서 따라왔다. 계단 앞에서 셋이 멈췄다. 양세리가 말했다. "됐어요". 그게 전부였다. 걷기 시작했다. 고필승이 따라가다 류미나를 돌아봤다. 류미나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난간에 손을 올렸다. 첫 번째 계단. 두 번째 계단. 시선은 정면이었다. 법원 계단을 내려오는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하나로 합쳐졌다. 고필승은 류미나가 계단을 다 내려올 때까지 반 보 뒤에서 멈춰 기다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는 그림자로 그녀를 배웅하고 있었다. 셋이 걸었다. 가을 햇살이 법원 담벼락을 길게 가로질렀다. 아무도 그걸 말하지 않았다.
같은 날. 강남 법무법인 화천강. 오후 네 시. 복도에서 목소리가 지나갔다. "이번 워크샵, 제주도래". 사무실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키보드 치던 손이 잠깐 멈췄다. 낮은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짧게 오갔다. 최시영이 자기 자리에서 그 풍경을 봤다. 3년 차가 됐다. 그 숫자를 처음 의식한 건 인사 발령도 연봉 협상도 아니었다. 워크샵 소문이었다. 옆자리 선배가 말했다. "최 변호사도 이번에 가죠? 이번엔 전원이래요". "저도요?" "3년 차면 당연하죠. 이제 진짜 팀이에요".
모니터를 봤다. 덮으려다 멈췄다. 나쁘지 않다. 아직은 그렇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이준형이 복도를 지나갔다. 멈추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며 말했다. "다음 주 목요일, 제출 기한 있어요". 최시영은 이준형의 "좋아요"가 1.5초였는지 2초였는지 머릿속으로 초시계를 잰다. "1.5초면 단순 확인이고, 2초면 진짜 칭찬인데..."라며 옆자리 동기에게 "너 아까 들었지? 몇 초였어?"라고 심각하게 묻는다. 최시영이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초안 서면이 화면에 펼쳐졌다. 제주도는 화면 너머 어딘가에 있었다.
밤. 화천강 사무실엔 주니어들이 배달시킨 치킨 박스가 열렸다. 최시영은 치킨을 먹으면서도 '프랜차이즈 본사와 가맹점주 간의 원가 배분율'을 계산하느라 맛을 느끼지 못한다. 동기가 "맛있지?"라고 묻자, "본사 마진율이 40%가 넘을 텐데, 이 정도 염지면 합리적인 소비야"라고 답한다. 최시영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노트북을 덮는다. 손끝에 남은 열기가 식을 때까지 그는 창밖 강남의 불빛을 본다. 그에게 파트너는 단순히 권력이 아니라, 이 치열한 세계에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유일한 증명서다. 그의 진심 어린 욕망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난다.
밤. 다시 사무실. 고필승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법원 가방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서류가 조금 흘러나와 있었다. 지퍼는 반쯤 열려 있었다. 탁자 위에 기일통지서가 있었다. 법원 도장. 선고 기일 추후 고지. 양세리가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고필승의 책상 모서리에 작은 박하사탕 한 알이 놓여 있었다. 고필승은 그걸 보지 못하고 가방과 씨름하지만, 독자는 양세리가 나가기 전 아무 말 없이 사탕을 내려놓던 그 건조한 손길을 기억한다.
고필승은 구겨진 기일통지서를 손바닥으로 평평하게 편다. 그리고 류미나가 처음 가져왔던 낡은 일기장 갈피에 소중히 끼워 넣는다. 그 종이 한 장이 7년의 억울함을 덮어주는 이불처럼 느껴지도록 조심스럽게. 1층에서 마봉림이 셔터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쇠 맞닿는 소리가 한 번, 부암동 골목으로 퍼져나갔다. 마봉림은 셔터를 다 내린 후, 2층 사무실의 불빛이 여전히 켜져 있는 것을 보고 혼잣말로 "밥은 먹었으려나..."라고 중얼거린다. 그녀는 가게 앞 가로등 밑을 한 번 쓸어내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닌 오늘이었다. 고필승이 불을 껐다.